그렇게 그와 단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난 후 윤지가 생긴 것을 그녀가 알게 된 것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불러오는 배를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시점에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 후에 혼자 윤지를 낳았다.
윤지를 낳고 기르면서 생활비가 부족하게 된 그녀는 윤지를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을 했다. 자식을 길러보니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기르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지 비로소 알게 되었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윤지가 돌이 되었을 때 윤지를 데리고 그녀의 고향에 가니 어머니는 윤지를 보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아무한테도 말을 하지 않고 애를 혼자 낳아서 기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리고 남편 없이 혼자 애를 어떻게 기를 것인지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울었고 그런 어머니를 보던 그녀도 울었고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던 어린 윤지도 울었다.
그 후에 그녀는 악착같이 살았다. 더 이상 그녀 혼자만의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무슨 일이든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이겨내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학습지교사가 된 지는 2년이 조금 못 되었다고 했다.
경숙의 말을 듣고 수현은 그녀가 살아왔을 인생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고 그녀는 그런 그의 위로를 위안 삼아 숨죽여 흐느꼈다. 조금 진정이 되자 경숙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오늘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다하게 될 줄이야.”
“때로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홀가분해질 때가 있다고 하잖아.”
“그러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아. 너에게 괜한 얘기를 한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아까보다 네 얼굴이 한결 가벼워 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훔치며 시계를 바라보던 그녀가 어머 시간이 벌써 10시가 넘었네, 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서 자고 있던 윤지를 깨우려는 그녀를 그가 제지하고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 시간도 늦었으니까. 윤지는 내가 안고 내려갈게.”라고 말하고서는 윤지를 안아 올렸다.
곤히 잠든 윤지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의 차로 찾아간 경숙의 동네는 그녀의 말처럼 2층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그중 한 주택 앞에서 차를 세운 그가 윤지를 안아서 그녀가 안내하는 집으로 향했다. 출입문을 열고 죽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서 가다가 모퉁이 있는 문 앞에서 멈춰 선 그녀가 열쇠를 꽂아 돌리고는 안에 들어가 전등을 켰다. 그 뒤를 이어 그가 잠든 윤지를 데리고 들어가서 경숙에게 건넸다.
윤지를 건네고 그가 둘러보니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작은 거실 겸 부엌이 있었고 화장실로 보이는 문 앞에 빨래건조대가 있어서 공간이 더 좁아 보였다. 그리고 방이 2개가 있는데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그중 한 방에다가 윤지를 누인 그녀가 나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수현은 그런 경숙에게 잘 자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녀의 집을 나와서 차로 걸어갔다.
차에 타기 전에 뒤를 돌아서서 지나온 길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골목길에 가로등 불빛 하나가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는데 그 가로등 밑으로 사람들이 내어놓은 쓰레기봉투가 어지러이 쌓여있었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초인종 벨소리에 수현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모니터를 확인했다. 경숙이 무거운 서류가방을 들고 서서 그가 문을 열어주기를, 그가 인터폰으로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달라는 듯이 얼굴을 들이밀고 서 있었다.
수현은 잠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버튼을 눌러서 문을 열어주었다. 밖에 나가보니 그녀는 무거운 서류가방 사이에서 쇼핑백 봉투를 하나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이거 내가 쉬는 날 만든 겉절이 김치야. 맛이 괜찮을 거야. 너한테 지난번에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우리 거 담는 김에 네 것도 조금 담아서 가져왔어.”
“겉절이 김치?”
“응, 나는 다음 수업 있어서 가야 하니깐 맛있게 먹어. 갈게.”
수현은 무거운 서류가방을 들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경숙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쇼핑백을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쇼핑백의 무게가 제법 무거웠다. 무거운 서류가방에 겉절이 김치까지 가지고 이곳까지 버스를 타고 걸어서 들고 왔을 것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무거웠다.
아까 쇼핑백을 건네면서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던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것을 보았다. 아직 4월이라 땀을 흘릴 날씨는 아니었건만 그녀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들고 오느라 무거웠을 겉절이를 꺼내어서 냉장고에 넣었다. 맛을 보고 싶었지만 왠지 이 김치를 담은 통이 그녀의 어깨를 더 짓눌렀으리라 생각이 드니 얼른 치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다시 아까 읽었던 책을 읽으려고 앉았는데 글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축 처진 어깨와 이마의 땀방울이 겉절이 김치와 함께 떠올라서 그는 책을 다시 덮고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가서 넣어 둔 겉절이 김치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젓가락을 꺼내어 김치 한 점을 집어서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싱싱한 겉절이 김치의 맛과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수현은 순간 입안에 침이 고이며 밥솥을 열어 밥 반 공기를 퍼서 식탁에 앉아 겉절이 김치에 때 아닌 식사를 했다. 흰쌀밥에 겉절이 김치를 얹어 먹으며 그는 쉬는 날 커다란 다라를 주방에 펼쳐놓고 배추를 사다가 썰어 넣고 갖은 재료를 넣은 양념장을 버무리는 경숙과 이를 옆에서 지켜보며 앉아 있는 윤지의 모습을 상상했다.
겉절이의 양념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문득 어렸을 때 할머니가 장독대에서 막 김치를 꺼내어 세로로 쭉 찢어주어 밥 위에 올려주던 김치의 맛이 생각이 났다. 수현은 밥 반 공기를 비우고 다시 반 공기를 더 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