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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개월 Sep 09. 2023

15. 한옥 살면 아이디어 잘 나와요?

광고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한옥에 산다고 하면 다들 하는 말이 있다.


"한옥에 살면 아이디어 잘 나올 거 같아요, 카피도 막 잘 써지고"


사실 한옥에 살기 전엔 크리스마스 전날 옷장 속에 부모님이 숨겨놓은 보물선 레고상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처럼 은근 그런 기대를 했었다.

원래 사람은 익숙한 자극보다 낯선 자극을 받을 때

새로운 생각들이 더 잘 떠오르기 마련이고


콘크리트 벽과 엘리베이터, 이웃집들이 층층이 붙어있는 빌라와 아파트 속에서만 살다가

손이 닿지 않는 서까래,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나뭇결, 정갈하게 쌓여있는 기와, 툇마루 등은

나에게 완전히 낯선 자극이었으니.


처음 다이닝룸에 앉아 아이데이션을 했을 땐

정말 감개무량했던 것 같다. 크~ 이런 뷰를 바라보며 회의 준비를 할 수 있다니!!


하지만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런 뷰도 다 적응이 되고

낯선 자극들도 곧 익숙한 자극으로 변하더라


광고를 막 시작했을 햇병아리 시절

광고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번뜩이는 발상과 천재적인 영감을 기대하기보단


그냥 의자에 죽치고 앉아서 계속 계속 계속 머리를 싸매고

시간을 들여 오래오래 고민해야만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뜻이었다


근데 이 집은 엉덩이를 붙이게 하기보단

엉덩이를 떼게 하는 힘이 더 강한 것 같다


다이닝룸에서 노트북을 펴고 회의 준비를 하다가도

문득 창 밖을 보면

마당에 심어놓은 등나무에

물을 언제 줬더라 하면서 물도 좀 주고

툇마루에 쌓인 먼지도 좀 쓸고

오늘 햇빛이 참 좋네 하면서 빨래도 좀 널고

구석에 또 새로운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도 응원하고

하늘에 지나가는 구름도 좀 구경하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만들어 마시면서

마당에서 스쿼트를 좀 하다 보면

불현듯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오...!! 르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지만

대신

경직된 뇌가 조금은 말랑해진 기분을 느낀다


제주도에서 해녀일을 배우고 계시는

김창옥 강사님이 한 강연에서

숨을 잘 참기 위해선 숨을 잘 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아이디어를 내는 일은 숨을 꾹 참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숨을 참고 생각의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가

엉키고 엉킨 고민의 해초를 헤치고 기억의 산호더미를 뒤져

아이디어라는 전복 하나 들고 올라오는 것


근데 전복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수면 위로 올라와 숨 쉬는 것도 잊고

주구장창 차갑고 어두운 해저 밑을 계속해서 맴돈다면


숨을 꾹 참느라 경직될 때로 경직된 뇌가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더 깊숙한

자괴감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콧구멍과 입구멍으로 우울감과 스트레스가

저항할 힘도 없이 밀려들어오고

빛 하나 없이 캄캄한 고립감은

출구조차 찾지 못하고 더 깊은 자괴감 속으로

빠져버리게 만든다


결국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광고라는 일 자체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디어도 잘 낼 순 없지만 적어도

오래 즐겁게 내기 위해선

숨을 꾹 참는 것만큼

숨을 잘 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집은 나를 자주 자괴감과 고립감의 해저에서 해수면 밖으로 꺼내줘서

아직까지는 광고를 증오하진 않고 애증 정도의 상태로 서로 한 발씩 양보하고 있으니

참으로 천운이 아닌가 싶다.

 

광고를 증오해 어느 날 덜컥 사표라도 던졌다면

그다음 밀려오는 주택담보대출의 이자날에는

철 없이 무직자가 된 스스로를 증오하게 되었을 테니


결론적으로

한옥에 산다고 아이디어가 잘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아이디어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잘 나오게 도와줄 뿐.


툇마루에 앉아 달빛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잔하며 한숨 돌리고
마당에 심어놓은 등나무 꽃보며 한숨 돌리고
우리집 수호신 고양이 도자기 보며 한숨 돌리고
풍경소리 들으며 한숨 돌리는

이렇게 숨 고르기 좋은 집을 만들어준 지랩과 건축소장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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