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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개월 Aug 10. 2023

14. 타인은 지옥일까?

가까운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경계해야 하는 요즘.

드라마화도 된 어느 유명한 웹툰의 제목처럼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이 무척 서글퍼지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엔 응답하라 시리즈의

동네 풍경처럼 살갑고 따뜻한 이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옥에 이사 오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길 바라며 마당에 눈이 쌓이길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참고로 이땐 현관 초인종을 달기 전이었고… 놀라운 것은 지금도 초인종을 달지 않았다…;;;)

설마 유년시절 레고 보물선 세트를 받지 못한 나에게 미안했던 산타 할아버지가 로또 번호라도 들고 서프라이즈를 해주시러 오신 걸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더니 옆집 사모님과 정말로 산타에게 선물을 받아야 될 것 같은 어린 딸이 서있었다.


조금 늦었지만 이사 축하 선물 겸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건넨 상자에는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먹는다던 슈톨렌 케이크와 어린 딸이 손글씨로 앙증맞게 쓴 편지가 있었다. 자기의 이름과 옆집에 이사 와서 반갑다는 아이의 편지를 보니 어릴 적 받지 못한 레고 보물선 세트의 아쉬움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사실 옆집은 우리의 공사 소음과 먼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들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저주 한 박스를 줘도 그러려니 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인데 저주는커녕 달콤한 축복을 건네주는 이웃이라니 이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란 말인가!


우리의 대문을 두드려주는 이웃이 또 있다.

옆집 소녀는 콩콩콩 앙증맞은 노크를 해준다면

건너편 빌라의 주인이신 할아버지는 쿵쿵쿵 다소 과격하고 둔탁한 노크를 해주신다.

처음엔 우리 차에 기름이 샌다고 알려주러 오셨고

다음엔 골목에 더러워서 대신 쓸어주셨다고 가끔 쓸어주라는 말을 건네러 오셨고

또 다음엔 앵두나무에 앵두가 많이 열렸다고 직접 딴 과실들을 나눠주러 오셨다.

쿵쿵쿵 할아버지의 노크 소리는 과격하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은 매번 따뜻하다.


우린 정말 운이 좋게도 마음 한켠에 꽃밭을 간직한

이웃들을 만났지만


뉴스에서 sns에서 층간소음으로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사람들, 배달기사에게 갑질하는 아파트,

경비실 에어컨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들 같은

사막보다 더 삭막한 소식들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이웃이

나에게 칼을 겨누는 적이 되는 것만큼

불행한 일상이 또 있을까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그 말조차 우리를 배신해 버린 요즘.

우월감을 과시하기 쉬워지고

박탈감을 느끼기도 빈번해진 요즘.

도덕과 상식은 힘을 잃고

친절과 관용은 먼 옛날의 문화유산이 된 요즘.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을 이해하고

칼을 품고 살 수밖에 없는 각박한 현실도 이해한다.


그럼에도 우린 한 자루의 칼보단

한마디의 따뜻한 말과

한 모금의 물 한잔으로

우리의 이웃을 대해야 하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지 않을 때

살기보다 온기로 상대를 대할 때

물어뜯을 일도 물려 죽을 일도 없을 때

경계해야 하는 타인이 아닌

등을 맞댄 이웃이 될 때


이 지옥 같은 세상도

조금은 천국에 가까워질 테니



옆집 소녀의 따뜻한 크리스마스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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