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새로운 답은 가이드라인 밖에 있다
다 짓고 난 후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마당과 집 사이를 이어주는
외부와 내부의 중간부 장관직을 맡고 있는 툇마루다
영화 리틀포레스트에서 배우 김태리 씨가 무더운 한여름 시원하게 콩국수 한 그릇 말아
후루룩 더위를 식히던 바로 그 툇마루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과 조승우가 맛깔나게 삼겹살에 소주 한잔 걸치던
바로 그 툇마루!! 아 그건 툇마루가 아니라 그냥 마루였나... 어쨌든!
우리 부부가 툇마루에 가지고 있던 로망과 낭만도 바로 그것이었다.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열무국수나 콩국수를 말아먹고
선선한 봄가을에는 툇마루에 앉아 삼겹살도 지글지글 구운 김치에 말아먹고
달 밝은 선선한 밤에는 가벼운 안주에 막걸리도 한잔 걸치며 내일 회의도 말아먹는
바로 그런 툇마루.
하지만 우리의 툇마루는 그 낭만을 넉넉하게 채워주기엔
약간 자라다만 소년과 어른 그 중간, 청소년 시기의 몸집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최대한의 공간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 벽 위치를 좀 더 앞쪽으로 확장했지만
덕분에 처마의 폭은 상대적으로 좁아진 탓으로 툇마루 또한 처마의 폭에 맞춰 설계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땐 툇마루의 폭이 처마의 폭을 벗어나면 비에 젖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덜컥 겁이 나
청소년기의 툇마루를 우리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는데
막상 살고 보니 꼭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슬보슬 교양 있는 노신사와 같은 보슬비가 내리는 날엔 문제없지만
중2병에 걸린 질풍노도의 소나기라도 내리는 날엔 여지없이 툇마루는 빗줄기에
사정없이 구타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처음엔 처마의 폭이 더 넓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지만 나중엔
그냥 이럴 거면 툇마루를 더 크게 만들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마라는 가이드라인에 맞춰 툇마루라는 낭만을 안정적으로 설계했지만
짓고 보니 그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안전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린, 스스로 정해놓은 여러 가지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나 싶다.
집을 사는 것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금액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떠나서
대학생 때는 기숙사, 고시원, 월세방을 겨우겨우 살다가
아등바등 취업해서 전셋집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보통의 성장 과정을 지닌 사회초년생들에게
집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가이드라인 밖의 일, 까마득하게 먼 다른 세상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막상 집을 사게 되면 그렇게 상상 속 유니콘 같은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직장이나 진로를 정할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저 회사는 너무 대단해서 나는 못 들어갈 거야
내 스펙으론 딱 이 정도 회사가 만만하지
평생 문과로 산 내가 코딩은 무슨 코딩이야
난 내성적이고 게을러서 유튜버는 못해
등등
우린 스스로 정해놓은 삶의 가이드라인 안에서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리스크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찌 사람의 일이 계획대로 되겠는가?
굵은 유성 사인펜으로 힘 가득 주어 꾹꾹 그려낸 가이드라인도
상황이 변하고 세월이 변하면 옅어지고 흐려지기 마련이다
광고 아이디어를 낼 때도 그렇다
광고주나 AE들이 이번 광고 캠페인에서는
이런 톤앤매너와 이런 컨셉, 이런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을 말해주는데
그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지키면서 아이디어를 짜다보면 너무도 뻔하고 지루한
숙제 같은 아이디어만 나오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광고일을 해오면서 대부분 좋은 크리에이티브는
그 가이드라인에서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해석, 새로운 발상을 해왔을 때
더 큰 박수를 받았던 것 같다
우린 지금 우리의 인생에
어떤 가이드라인을 그려놓고 살아갈까?
혹 그 가이드라인이 우리의 가능성을 옭매는 족쇄가 되진 않았을까?
오늘밤은 나에게도 혹은 당신에게도
물어보고 싶다.
좁은 툇마루지만 낭만만큼은 넉넉하게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