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승기야, 오래 기다렸어?”
5.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승기, 평소와 다른 침울함이다.
“어 효상아, 새벽에 불러내서 미안하다.”
승기답지 않은 짧은 말투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그런 표정을 지으며 애꿎은 담배만 태우고 있다.
“승기야, 무슨 일인데? 급한 일이라서 나한테 전화한 것 아니야? 뭘 그렇게 뜸을 들여? 빨리 말해. 춥다. 여기.”
일단 판은 깔아줬다. 너무나 다른 승기 모습에 내가 더 불안하다. 평소에도 승기는 다른 이가 보기에 침울해 보인다. 하지만 그 침울함은 거만함에서 비롯된 자기애다. 이 감정은 승기가 아니기에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 승기는 자기와 비슷한 종족을 만나고 싶어 한다. 승기는 평소에 설명을 많이 한다. 설명은 보기 좋게 포장한 단어다. 승기는 설명을 가장해 상대방의 부족함을 드러나게 한다. 승기는 상대방의 부족함을 일깨우면 행동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적은 거의 없다. 십중팔구 언쟁으로 끝난다. 승기에게는 모든 이가 가르치는 학생으로 느껴지는 듯하다. 숱한 다툼으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바꿀만한데도 승기는 여전히 이 방식을 고집한다. 가끔 승기를 보면, 다른 행성에서 넘어온 외계인 같다. 지구인의 대화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능력이 너무나 뛰어난 외계인, 지구인의 삶의 방식을 따르기는 죽기보다 싫은 외계인. 지구인은 이해할 수 없는 깨달음으로 홀로 모든 지구인을 계몽하려는 외계인. 스스로 대화의 창구를 닫아 독야청청[73]을 선택한 외계인. 그로 인해 승기는 평소에 말이 없고 어둡다. 하지만, 타인에게 비치는 그의 침울함은 어쩌면 승기에게는 가장 행복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런 침울함은 아니다. 불안함이 눈동자에 그대로 노출된 매우 인간적인 침울함이다.
“효상아, 미안한데.... 돈 좀 있냐? 급하게 써야 할 곳이 있어서.”
6. 승기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한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내 앞에서 일어난다. 승기가 금전적 관계로 타인과 얽힌 사건을 한순간도 본 적이 없다. 그런 승기가 내게 돈을? 해가 어디에 있는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두리번거린다. 해가 뜨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오늘의 해는 서쪽에서 뜰 예정이다.
“곧 집 계약 기간이 끝나. 주인집에서 전세금을 올려 달라고 해서 그만한 돈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이사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말이다... 효상아...”
그렇게 승기는 대화의 물꼬[74]를 텄다.
“여보, 주인집에서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네. 금액이 커서 고민이야.”
“그래? 얼마인데?”
“오천만 원”
7. 아내가 말한다. 오천만 원이나? 그런 돈이 당장 어디에 있다고. 2년마다 주인집에서 전세금을 올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러게 서울에서 사는 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자기야, 학교 성적이 좋다고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좋은 대학에 입학한다고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도 않는 것 같아. 자기야, 난 말이야,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를 좀 다르게 키우고 싶어. 우리처럼 살아가라고.”
사람들은 직면한 다양한 문제 중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안이라면 더는 고민하지 않는다.[75] 아이의 교육 방향은 아내가 확고하다고 믿었다. 그런 아내가 변했다. 아내는 아이의 교육을 위해 서울에 살기를 원했다. 심지어 아내는 학창 시절에 그리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았다. 무엇이 아내를 변하게 했을까? 나 때문인가? 그래, 나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나 때문이다. 아내는 전형적인 이상주의자다. 그런 아내를 나는 사랑했다.
“자기야, 난 안목이 높은 여자야. 그러니까 자기는 아무런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기를 믿기 어려우면 안목이 높은 나를 믿어봐. 자기 역시 고급이니까. 다 잘 될 거야.”
8. 현실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이상의 날개를 펼치기 어렵다. 가정의 작은 균열은 접착제로 붙이며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작은 균열을 모른 척했다. 하지만 작은 균열은 서서히 생각지도 못한 큰 금을 불시에 선물한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까지, 작은 균열이 이처럼 쌓여가는 줄 몰랐다. 너무 바쁘게 지내서다. 다들 그렇게 살아서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해맑게 웃던 아내의 모습은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아내는 믿어 왔던 많은 것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했다. 믿어 왔던 많은 것 중에 나도 포함한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아내의 응원은 꿈에서나 만날 수 있다. 살면서 아내의 응원을 마음에 두며 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서운함은 없다. 하지만 아내의 예지대로 난 고급이 돼야 했었다.
우리는 서로 닮아갔다.
높은 온도의 물체를 따라 낮은 온도의 물체로
열을 전도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서히 중화[76]되었다.
9. 닮아간다는 표현은 참으로 따뜻한 느낌이다. 안 그런가?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 열은 낮은 온도의 물체에서 높은 온도의 물체로 이동할 수 없다. 우리의 중화도 한쪽의 성향으로 치우쳤다. 뒤돌아보면, 살금살금 다가오는 밤도둑처럼 우리의 대화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밤새도록 실랑이했던 그때가 그립지는 않다.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연애하는 동안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연애할 때 느꼈던 다름의 즐거움은 결혼 후 나를 힘들게 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비참했던 것은 그녀의 바람에 한참 미치지 못한 경제적 능력이다. 이상은 현실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내는 불편한 옷을 전부 버렸다. 더는 양말과 수건을 따로 빨지 않는다. 아내는 식사가 끝난 후 더는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 아내는 더는 백화점을 가자고 조르지 않는다. 아내는 더는 말하지 않는다. 과거의 아내는 이제는 없다. 그렇게 평온한 날을 만끽 중이다. 사실, 이런 상황을 평온한 날이라 말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서로의 다름을 설명해야 했던 당시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우린 닮아갔다.
아내는 더는
나를 고급이라 하지 않는다.
더는 내게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현실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to be continued....
[73] 독야청청 (獨也靑靑): 홀로 푸르고 푸르다는 뜻으로, 높은 절개가 있음을 비유한 말.
[74] 물꼬: 일이나 이야기의 실마리.
[75] 존 스튜어트 밀,『자유론』,서병훈 옮김, 책세상, 2005, p87
[76] 중화 (中和): 서로 다른 성질의 물질이 서로 융합하여 서로의 특징이나 작용을 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