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10. 지방의 작은 집을 정리한 돈으로 서울에서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아내의 말 따라, 지방을 벗어나 서울에 입성하면 아이의 교육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돈에 맞춰 서울에서 전세살이를 시작할 때만 해도 아이 교육을 포함한 모든 조건이 지방에서 살 때보다 좋아질 거라는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모든 게 팍팍해졌다. 팍팍함을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까지 버리면서 살아간다. 효상이와 난 철학을 가르치며 밥벌이를 한다. 지금의 효상이는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만의 길을 걷고 있다. 그의 길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계속해서 내 이야기를 하자면, 슬프게도 현실은 학생에게 가르친 내용과 거리가 멀다. 인생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라 열변[77]을 토했지만, 서울살이는 그동안 믿어온 신념의 부산물[78]과 거리가 멀었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가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심지어 우울증까지 왔다. 이러한 괴리감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아내와 난, 남들과 다른 우리만의 인생 이야기가 있다고 굳게 믿은 나르시시스트였는지도 모른다.[79]
백로이기에 까마귀와
어울릴 수 없다고
믿었던 삶은 무너졌다.
처음부터 백로는 존재하지 않는
까마귀의 허상인가?
11. 지방에 있을 때도 풍족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부족한 느낌도 없었다. 서울의 전세살이는 모든 게 부족하다고 느낀다. 두 해를 지낸 후 지방으로 돌아가자고 아내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는 지금의 생활을 좋아하는 것 같다. 무엇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현재의 환경에 익숙해지면 더 나은 환경을 동경하는 게 사람이다. 적어도 아내는 그래 보인다. 아이의 교육을 핑계로 서울에서 더 좋은 동네로 이주를 원한다. 그래, 핑계는 아니다. 아내는 진심이다. 진심으로 아이의 교육을 걱정하고 있다. 아마도 아내는 나에 대한 실망감을 다른 곳에서 보상받으려는 것 같다.
아내는 나를 포기한 걸까?
12. 아내의 바람을 채우려면 부동산 관련 정책에 자연스레 귀 기울이게 된다. 가난한 게 죄인 서울 생활은 참 외롭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제일 먼저 손 보려는 게 부동산 정책이다. 한쪽은 큰 정부 역할로 부동산 시장을 정부가 통제하려 하고, 다른 한쪽은 작은 정부 역할로 부동산 시장을 시장에 맡기려 한다. 그리고 약속한 듯이 모두 실패한다. 그런데도, 희한하게도, 누군가는 정권의 변화와 관계없이 꾸준하게 돈을 번다. 꾸준하게 돈을 버는 그들에게 부동산 정책은 중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해가 지나도 그대로인 살림살이에 부동산 정책이 문제가 있다고 나는 단정 짓는 걸까? 그냥 원망하고 싶은 대상이 필요했을까? 어쩌면 부동산 정책은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게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가 난다. 당장 오천만 원을 구하기는 어렵다. 아내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아이 학교를 고민해 빚을 내어 이곳으로 이주했다. 아내도 나도 당분간 이곳에 지내기를 원한다. 도대체 서울에 번듯한 집을 가진 자는 나와 다른 게 무엇인가? 더는 이사하고 싶지 않다. 누가 좀 알려다오. 제발 좀 알려다오.
택시 창문을 넘어서
한강의 물빛을 조명 삼아
넓게 늘어진 수많은 주택 중
내 자리는 없다.
13. 집 근처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들러서 현재 전세자금으로 이사할 수 있는 매물이 있는지 알아봤다. 집주인이 전세금 오천만 원을 올리려고 하는 게 터무니없는 가격이라 믿었는데 현실은 아니었다. 어디를 옮겨도 이 정도의 전세금을 요구한다. 당장 다음 달까지 인상한 전세금을 주거나 이사를 해야 하는데 딱히 방법은 없다. 한계치까지 대출을 받았기에 더는 끌어올 곳도 없다. 벌써 사무소만 10번째이다. 한결같은 목소리로 공인중개사들은 조언한다. 제일 나은 방법은 전세자금에 맞는 지역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고. 이 조언을 따르면 아이가 통학하기는 어렵다. 전학을 고려해야 한다. 솔직히 이렇게 털어버리고 싶다. 얼마나 간편한 해결책인가? 그런데 난 죽기보다 이 말을 아내에게 하고 싶지 않다. 이 말을 전하면, 아내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을 상상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렇게 막막한 심정으로 11번째 사무소의 문을 연다.
“안녕하세요, 말씀 좀 묻겠습니다.
다음 달에 이사하려고 합니다. 전세입니다.
매물이 있습니까?”
14.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나’다. 현재 전세자금으로는, 이 근처에서 살기는 어렵다. 그게 내 결론이다. 더는 모르겠다. 이사를 가야 한다. 아이도 전학시켜야 한다. 또한, 허탈하게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도 익숙하다. 아내도 딱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거다. 무능한 남편이라 비쳐도 할 수 없다. 더는 고민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난 무능한 남편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11번째 사무소에 나오려고 할 때 중개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사장님, 매물이 딱 하나 있기는 해요. 지금 거주하는 곳 하고 같은 평형 대에요. 위치도 이 근처예요. 전세금도 지금과 동일하고요. 사실 다른 분이 오늘까지 확답을 준다고 해서 말을 안 했어요. 시간을 보니까 아무래도 그분은 거래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 같고, 사정을 들어보니까 딱하기도 해서요. 어떠세요? 혹시 관심 있으세요?”
to be continued....
[77] 열변 (熱辯): 열렬한 변론.
[78] 부산물 (副產物): 어떤 사물을 다루며 행할 때 부수적으로 생기는 일이나 현상
[79] 제프리 밀러,『스펜트』,김명주 옮김, 동녘사이언스, 2010, p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