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 세상 물정, 부동산 물정 모르는 우리가 작은 아파트 매도 잔금을 4개월 후로 받아놓았다.
‘매수자가 잔금 날짜를 4개월 뒤로 한다는 데 동의하세요?'
'뭐 돈 준다는데 괜찮지 뭐. 산다는 게 어디야.'
'큰돈 구하는데 힘들겠지.'
’네 괜찮아요.‘
그때도 부동산 최고의 불장이었다. 부동산의 ’부‘자도 모르는 우리가 저지른 최고 실수였다.
철없는 무지가 때로는 다른 이에게 죄가 된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을지언정 결과가 안 좋으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된다. 우리네 인생 상처받고, 상처 주는 고슴도치 인생이다. 잔금 전 그동안 우리가 판 작은 집은 1억 넘게 오르고 있었고, 우리는 옮길 집을 2달 동안 구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강남 낡은 아파트는 계약금은 크게, 잔금 기간을 짧게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물정 모른 우리가 세월아 네월아 받을 돈을 4개월 뒤로 미뤄놨으니….
'우리가 잔금을 4개월 뒤로 약속했으니, 강남 집 잔금도 4개월 뒤로 해주세요.'
강남 사모님들이 코웃음 치는 것은 당연하다.
돈은 못 받고, 살집들은 미친 듯이 오르고, 집도 못 사고, 매일같이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마냥 기다리다간, 영원히 집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신랑과 나는 매일 오르는 부동산을 보며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매수자가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벌어진 일, 우리가 선택한 일이었으므로 탓할 수도 없었다. 계약을 깨야 하나, 생각을 잠시 했으나 우리는 그럴 배짱이 없는 부동산 초등학생이었다. 그때 초등학생들의 싸움에 과감히 소리 지르며 다가온 어른이 있었다. 역시 미성년자에겐 듬직한 어른이 필요하다.
'배액배상을 시행하라.'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 같았다. 사실 끝까지 망설이던 우리에게 조언을 주셨던 큰 어르신의 지혜이다. 강남 집에 들어갈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금전적 손해도 물론이거니와 시간적 손해를 만회할 재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꼬여버린 매듭을 풀고자 했던 우리는 그렇게 풀리지 않는 매듭을 안고 쩔쩔매고 울먹거렸다. 그때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리라는 조언은 가장 필요했지만 가장 두려웠던 해결책이었다. 주어진 답안지에서만 답을 찾는 게 아니었다. 프레임을 바꾸면 해답이 보인다. 계약금액을 배상해도 집값이 더 올랐고, 기회비용이 날아가니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그리하여 부동산계의 최강수가 등장한다. 이름하여 배액 배상….
매수자에게도 매도자에게도 중개인에게도 참 가슴 아픈 단어이다. 짧은 단어 하나에 매도인, 매수인, 중개업까지, 3집 이상이 수렁에 빠지는 강력한 단어이다. 그렇게 007 부동산 작전에 추가 작전이 급하게 내려졌다. 강남 집 비밀리에 계약하는 그 시각 배액 배상도 동시에 진행된다. 잔금 전이니, 시세에 맞는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배액 배상만 통보하면 된다.
하지만 인생이 어찌 그리 쉽게 단순히 돌아가던가. 그 시각 불안한 기운을 느낀 매수인은 날짜보다 일찍 잔금을 치르러 은행으로 가고 있었다.
강남에서는 비밀리에 계약이 진행 중이고
작은집은 비밀리에 배액 배상이 진행 중이며,
새로운 계약자를 비밀리에 물색 중이다.
계약 파기 불안함을 느낀 그는 비밀리에 빨리 잔금을 입금하러 은행으로 향하고 있다.
어느 스릴러물 못지않은 일촉즉발의 사건이 동시에 벌어진다. 불안한 음악은 점점 격렬해진다.
카메라는 각자의 절박한 상황을 연신 찍어댄다.
강남의 회색 하늘 씬,
작은집의 텅 빈 거실 씬,
기대에 부푼 새로운 부동산과 계약자 씬,
은행으로 향하는 불안한 발걸음의 잔금 씬,
관객은 숨을 죽이며 축축한 손만 만지작거린다.
배액배상당한 매도자의 절규가 들리는듯했다.
매도자와 매수자의 한숨이 들리는 듯하다.
각자의 상황을 모르는 배우들은 그저 본인의 연기에 혼신을 다한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즉시 계약금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불장일 경우 계약금이 많지 않으면 배액배상의 가능성이 있다. 배액배상은 잔금을 치르기 전 계약금보다 집값 상승이 빠르면 계약금의 2배를 지불해 버리고, 계약을 파기해 버리는 것이다. 즉시 신랑에게 연락해 돈을 부치라 했다. 집은 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보지 못했다.
집 매수 매도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참 짜릿하고 경험이다. 그렇게 부동산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한 번에 다 체험했다. 역시 체험학습은 중요하다.
호가 들쑤셔서 2억 올리기
계약서 눈앞에서 찢김 당하기
경매판 기웃거리기
부동산 죽돌이
끝판왕 배액 배상까지….
다들 이렇게 힘들게 아파트를 구하나? 나만 몰랐던 것인가. 다들 이렇게 힘든데 그냥 말없이 조용히 사는 것인가. 정말 독한 인생, 독한 사람들이다. 왜 아무도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지?
강남 아파트 본계약 당일이다. 지방에서 오신 매도자는 멋들어진 중절모와 결이 좋아 보이는 머플러를 하고 오셨다. 무사히 계약을 마치고 못다 한 한마디를 정중히 어르신께 드린다.
‘집 한 번만 보여주세요.’
모두들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