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운동해야지."
"운동하기 싫어."
"줄넘기하면 이천 원 줄게 같이 나가자."
"엄마 만 원은 줘야 하지. 나 안가."
아이의 대화에서 잠시 멍해진다. 우리 아이가 돈을 너무 쉽게 보는 것인가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다시 곰곰이 생각한다. 언제부터 돈의 가치가 이렇게 떨어졌을까? 가끔 가는 할머니 집에서 아이는 용돈을 5만 원을 받았다. 갈 때마다 큰돈을 받아서 그런지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아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받은 용돈을 쉬운 돈이라 생각했다. 예전에 내가 세뱃돈으로 받는 만원이 굉장히 큰돈이었다. 초등학생은 오천 원 중학생은 만원, 고등학생은 조금 더 큰 금액. 그렇게 받은 금액이 좋았는데…. 세월이 지났을까 물가 상승률이 아이의 생각에 그대로 반영된다. 게다가 코로나 시국에 돈을 마구 찍어내니 물가 상승률이 예고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실제 올해 들어 시장바구니 물가가 올라갔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영원히 돈의 가치가 계속 유지될 수는 없겠지.'
초등학생에게 선심 쓴다고 이천 원을 베팅했지만 보기 좋게 거부당했다. 아이와의 대화에서 나는 돈의 가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처음 오만 원 권이 나왔을 때 누가 그렇게 큰돈을 쓰나 의아해했다. 지금 내 지갑에 들어있는 오만 원짜리를 보면서 예전보다 훨씬 흔해졌음을 느낀다.
화폐는 그 시대의 신용에 대한 약속이다. 어느 시대에는 돌이 돈이었다가, 어느 시대에는 조개껍데기가 돈이었다. 즉 사람들의 약속에 따라 그 형태는 다양하게 바뀔 수 있다.
양적 완화를 하는 현시대에 화폐를 모은다, 즉 월급만을 차근차근 모은다는 것만으로 물가상승률과 부동산과 주식 등 실물자산의 상승을 따라잡기엔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다. 월급을 모아 대출 없이 집을 구매한다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 생각이다. 적금으로 모으는 동안 집값과 떡볶이값은 상승하고, 반면에 내 월급은 그대로인 것 같다. 겨우겨우 월급 모아 도착했다 싶으면 집값은 저 멀리 달아난다.
'오빠 나 내년 되면 오빠랑 나이가 같아지니까 그때는 반말하자.'
몇 년 전 딸아이가 한 말이다. 아이가 나이를 먹으면 오빠의 나이는 그대로 있는가? 그건 아니다. 전적으로 나 중심으로 사고한 결과이다. 월급만으로 집을 사겠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
1922년 독일은 전쟁 배상금으로 인한 재정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마르크를 막대하게 발행한다. 이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고 지폐를 땔감으로 쓰고, 지폐 뭉치를 장난감 벽돌 쌓기를 하는 당시의 사진을 볼 수 있다.
그 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한 부양책과 재난지원금 등으로 돈의 가치가 땅끝으로 떨어지고 있다. 현금이 시중에 너무 많다. 돈은 은행에서 마구 찍어내고 재화는 한정되어 있으니 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다. 연일 뉴스에서 물가상승을 노래한다. 결국, 역사는 반복된다.
대공황, 전쟁, 하이퍼인플레이션, 스페인 독감.
이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100여 년 역사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현금만을 들고 있다가 다른 자산이 오르면 그만큼 현금만을 보유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산이 줄어들 수 있다. 자산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진짜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책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일과 현상을 파악하고 이해해야 한다. 앙드레 코스톨라니나, 워런 버핏이 아닌 이상 우리는 무지하고 나약해서 거인의 어깨에 오르지 않으면 험난한 숲을 헤쳐나가기 힘들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힘든 시기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새로운 부가 창출되고 있다. 지식은 쌓여가고, 비대면으로 인해 오히려 쉽게 양질의 교육에 접근할 기회가 확대되었다. 또한, 메타버스라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건설되고 있다. 지금은 조개껍데기로 물건을 살 수 없듯이, 현금으로 가상세계에서 소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새로운 화폐의 출현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있다. 이 모든 변화가 누구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위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위기인가 기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