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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축플래너 Aug 26. 2022

내 인생을 바꾸는 황금열쇠

놓치고 싶지 않은 여인 - 3.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

소연이의 병명을 알았지만 절대 아는 체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시간은 흘러 계룡산에서 1박 후 다음날 용인 민속촌을 경유하여 강촌에서 1박을 하는 것으로 총 2박 3일 일정의 겨울 원정 날짜가 잡혔다. 첫째 날은 오전 8시에 학교 앞에 전세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대전 계룡산에 도착한 후에 동학사를 거쳐 갑사로 가는 길 코스로 등반하면서 자연경관을 촬영하는 것이었고, 둘째 날은 용인 민속촌에 들려서 조별로 촬영하는 자유시간을 가지고 오후에 강촌으로 넘어가서 저녁 캠프 파이어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소연이에게 연락을 해서 겨울 원정에 대한 설명을 하였고 약속한 대로 촬영을 같이 가자고 했다. 산에 올라갈 때는 내가 업어주고, 민박집에서는 내가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해주고, 가방도 들어준다고 약속하였다. 내가 겨울 원정 기간 동안 머슴이 되어준다고 큰소리쳤다. 소연이는 태어나서 처음 가는 여행이라 너무 설렌다고 하였고 내가 한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고 부모님과 상의한 후에 답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원정 촬영 가기 전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있는데 소연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소연이의 부모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나를 만나보고 나서 허락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다닥 준비를 하고 오전 11시쯤 소연이의 집으로 갔다. 초인종과 함께 소연이가 문을 열어주었는데 화장 안 한 수수한 모습이 내가 원했던 청순한 여인 그 자체였다. 소연이를 따라 거실로 갔는데 부모님과 오빠까지 가족 모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집안 분위기는 따뜻했고 부잣집이라는 것을 현관 입구에서부터 알 수가 있었다. 현관에서 거실로 가는 복도와 소파 뒤 벽면에 동양화와 붓글씨 액자 여러 점이 걸려있었고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브라운 색상의 가죽 소파가 있었다. 어머님은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시며 소파에 앉으라고 하셨고, 소연이는 같은 학교 사진 동아리 동기며 기장이라고 가족들에게 소개했다. 소연이의 오빠는 키가 180cm은 넘어 보였으며 무테안경을 썼고 여학생에게 인기도 많을 것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적이며 단아해 보이는 어머니의 눈매는 소연이와 판박이 었다. 소파에 앉자 아버님이 소연이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하시며 전공이 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이어서 소연이가 원정 촬영을 가겠다고 울고 불고 난리치고 밥도 굶어서 마지못해 보내주기로 하였는데 혹시라도 몸이 아프면 어떡할 거냐고 물으니 소연이가 자기를 보살펴주기로 약속한 동기 남학생이 있다고 하여 확인차 불렀다는 것이다. 공과대학 OO과 누구라고 대답하고 제가 책임지고 무사히 다녀오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태풍이 몰아치더라도 소연이는 꼭 안전하게 보호하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자 부모님의 표정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소연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을 떠나 2박 3일 원정 촬영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집을 나서는데 어머님과 아버님이 현관까지 따라 나오면서 "잘 부탁하네."라고 재차 당부하셨다. 소연이는 출발할 때 보자며 환하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원정 출발하는 당일 아침 나는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일찍 나온 다른 선배 및 동기들과 자판기 모닝커피를 마시며 소연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멀리서 검은색 각 그랜저 한 대가 오더니 소연이가 내렸다. 나는 소연이를 보자마자 바로 뛰어가서 가방을 받아 들고 소연이 아버님에게 90도로 인사를 드렸고 아버님이 떠나자 소연이에게 자판기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면서 전세 버스 앞에 있는데 역시 우려했던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동기 남학생부터 선배들까지 소연이 주변에 달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소연이하고 둘이 버스에 앉아서 가는 나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보다 3살이나 많은 예비역 돼지 껍데기 선배가 이번에도 소연이 옆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더니 버스에 타자마자 소연이를 반 강제로 데려가 같이 앉아버린 것이다.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동기 여학생들과 여자 선배들의 눈총도 따가울 것 같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소연이하고 최대한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소연이 바로 뒷 좌석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자 선배님하고 같이 앉게 되었다. 앞에 선배가 소연이에게 게임을 하자며 '쎄쎄쎄'를 하고 자빠졌는데 정말 어이가 없어서 욕도 나오지 않았다. 




중간에 들린 휴게소에서 소연이가 화장실을 가기 전에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체하며 동기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웠다. 계룡산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동학사를 지나 갑사로 가는 산행을 시작했는데 계룡산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등산하기에 힘든 산 중에 하나다. 동학사에 갑사로 가는 등산 코스는 총 7.8km이며, 일반인이 휴식 포함하여 2시간 50분에서 3시간이 걸린다. 동학사를 지나자 가파른 돌계단이 나오는데 소연이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소연이는 초반부터 가장 뒤에 처져서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가서 도와주려고 했지만 선배 두 명이 소연이 옆에 붙어 있어 도저히 내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1시간 정도 올라가니 소연이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남매탑에 도착해 기다렸는데 그때 나를 쳐다보는 소연이의 눈빛은 지금도 선명하게 내 뇌리에 박혀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꼴도 보기 싫은 선배의 팔을 잡고 힘겹게 서있었다. 나를 원망하는 듯한 그 눈 빛 속에는 내가 와주길 바라는 간절함도 녹아 있었다. 그 눈 빛을 보는 순간 미안함을 넘어 죄책감이 들었고 소연이에게 다가가 "내가 도와주까?"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소연이 옆에 있던 2명의 선배들이 알아서 같이 갈 테니까 나보고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소연이를 등지고 내 모습을 보이기 싫어 빠른 걸음으로 남매탑을 지나 갑사로 내려갔다. 소연이는 이날 갑사까지 오는데 무려 4시간 40분이 걸렸다. 선배들 말을 들어보니 애가 쓰러질 것 같아서 천천히 걷다가 쉬 고를 반복하며 겨우 부축해서 왔다고 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연이는 도착하자마자 버스에 타서는 곧바로 잠들어 버렸다. 




숙소에 도착하여 식사와 촬영할 때 같이 행동하도록 5명씩 1조로 해서 6개의 조를 발표하였는데 운명의 장난이 아닌 선배들의 농간으로 소연이는 나하고 같은 조에 배정받지 못하고 다른 조가 되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소연이를 찾아보니 뒷마당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다른 조에 있던 여자 동기들도 소연이와 같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소연이에게 내가 설거지를 할 테니 소연이가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어 달라고 했다. 그런데 괜찮다며 거의 다 했다고 하면서 조금만 있으면 설거지가 끝나니 방에 같이 들어가자고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는 설거지 하는 소연이의 뒷모습을 보고 기다렸다. 시골에 오래된 민박집은 방바닥만 뜨겁지 외풍이 심해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어야 했다. 소연이와 방에 들어가서 같이 이불을 덥고 앉아서 눈치만 보다가 마침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다 챙겨줘야 했는데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 내 생각대로 상황이 안된다. 썩을" 소연이는 괜찮다고 하면서 오늘 계룡산에서 죽다 살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몸 상태가 좋아졌고 나름 모든 것이 재밌다고 했다. 그리고 나하고 이렇게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있으니 기분이 좋다고도 했다. 소연이의 눈가에 미소를 보니 마음이 놓였고 그날 저녁은 소연이 조에 꼽사리 끼여서 윙크 게임, 007 빵, 똥 화투, J카드, 369 게임으로 배가 아플 정도의 웃음을 선물해 주었다. 내가 공부보다는 잡귀에 능하여 게임마다 특유의 유머를 섞어가면서 빵빵 터트려주는 스킬이 있었다. 물론 다음날에는 나하고 같은 조의 선배와 동기 여학생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용인 민속촌에서의 자유 시간에서는 촬영 중간에 소연이와 단둘이 호수가 보이는 곳에 앉아서 데이트를 즐겼고, 서로가 더 가까워졌다. 




그런데 술이 원수라는 것을 내가 증명하기라도 하듯 원정 마지막 날 저녁에 강촌 캠프 파이어 회식자리에서 소연이에게 상처를 주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다. 회식 자리가 있던 식당에서는 소연이가 적극적으로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식당의 중간에 다른 동기 여학생들과 선배하고 어울려서 앉아 있었는데 식당에 있던 접이식 의자를 들고 내 옆에 와서 합석을 한 것이다. 주변에서 "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속으로 너무 기뻤다. 그렇게 소연이와 회식자리에서 술자리는 계속되었고 나는 이미 주량을 넘어서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도 아파서 담배도 필 겸 바람 쐬러 나왔는데 소연이가 따라 나왔다. 같이 야외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나도 모르게 갑자기 소연이에게 "나 니 병명을 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당황한 소연이가 무슨 병인지 이야기해보라고 하여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말았다. 순간 소연이는 "할 일 진짜 없나 보다 그런 것까지 다 알아보게."라는 말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아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라는 후회와 함께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식당에 들어가니 선배들 사이에 앉아서 소주를 계속 마시고 있었다. 소연이에게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냐고 이야기를 했지만 듣는 척 마는 척 신경 쓰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무시했다. 그렇게 알퐁스 도데의 '별' 이야기처럼 스테파네트 공주와 이별을 앞둔 아침이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마치 양치기 소년이 된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아오는 마지막 날 관광버스는 강남역에서 하차를 할 수 있게 정차를 해주었다. 마지막 날까지 돼지 껍데기 선배는 소연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끈질긴 놈. 소연이가 내리자 나도 선배들 및 동기들에게 먼저 간다고 인사를 하고 따라서 내렸다. 소연이의 짐을 달라고 하여 내가 들고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집까지 가는 길에 둘 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파트 입구에서 짐을 건네주었는데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내 눈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게 소연이의 마지막 모습일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들었지만 그 예감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틀렸다. 2학 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소연이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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