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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축플래너 Aug 26. 2022

내 인생을 바꾸는 황금열쇠

어머님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내가 그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내 편이 되어 줄 단 한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다. 어머니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으로 자식을 낳으셨지만 조건 없는 무조건 적인 사랑으로 당신의 생을 다할 때까지 보살피는 분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는 허리 디스크가 있는데 그 병은 어머니가 둘째를 낳고 생겼다. 아직 3살 아기였던 내가 어머니 품에 안긴 갓난아기를 보고 다가가지 못하는 게 안쓰러워 업어서 재우는 바람에 생긴 병이라고 했다. 갓 출산한 어머니가 나를 업고 병원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재우느라 허리에 병이 생긴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시험에서 100점을 받았을 때 가장 기뻐했던 분도 어머니였으며 감기에 걸려 열이 펄펄 나고 아플 때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 밤새도록 병간호해주던 분도 어머니였다. 대학교에 합격 소식을 전했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고,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에는 뛸 듯이 기뻐하며 춤을 추셨다. 내가 프로 스펙스 옷을 사고 싶다고 하면 어머니 자신은 동네 시장에서 싸구려 옷을 입을지언정 친구에게 카드를 빌려서라도 내가 사고 싶어 했던 옷을 사주셨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어머니가 계란 프라이와 김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다. 돼지고기와 생선구이도 싫어하시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나와 동생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 일부러 안 드시는 거였다. 고기도 먹어본 자가 맛을 안다고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머니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삼겹살 파티를 할 때에도 3~4점 밖에는 안 드신다. 더 드시라고 하면 배가 불러서 더 못 먹는다고 하신다. 내가 장가갈 때는 자신이 하고 있던 금목걸이와 반지를 녹여서 며느리에게 팔찌와 반지를 선물해 주셨다.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머니한테 받은 사랑을 글로 쓴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대부분의 자식들은 결혼 후 출가하면 살아가기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 생일날이나 명절 때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뵙지 못한다. 명절 때 해외여행이라도 가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이번 명절에는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머니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오히려 걱정해 주신다. 나 역시도 그랬다. 찾아뵙는 것은 고사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 한 통 제대로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어릴 때 기억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머리숱이 없어 머릿속 두피가 하얗게 드러나 보이고, 얼굴에는 푹 파인 듯한 주름 살이 가득하며, 손등에는 검 버섯과 앙상한 손가락의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얼굴과 손, 발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덧 80살이 되어 늙어가는 어머니의 얼굴을 50대 때의 어머니의 얼굴로 상상하고 편집해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내가 10살 때의 일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어머니가 항상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던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동생들과 배고프다며 밥 달라고 징징댔다. 간식을 달라고 떼도 썼다. 어머니는 아픈 몸을 겨우 일으켜 음식을 차려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한 폐결핵 3기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기침이 계속 나고 몸에 힘이 없어 동네 병원을 찾았는데 돌팔이 의사를 만나 한 달 동안 감기약만 처방받았던 게 폐결핵 악화의 원인이었다. 한 달 동안 약을 먹고 항생제 주사를 맞아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병원을 찾았는데 그 병원에서 폐결핵 3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폐결핵 진단을 내린 의사는 어떤 병원에서 감기라는 진단을 받았냐며 오진을 한 의사 놈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펄쩍 뛰었다고 한다. 이미 시기를 놓쳤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치료를 해보자고 폐결핵 진단을 한 의사가 권유를 하였고,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한 손에 가득 찰 정도의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서 완치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치료를 거의 포기하였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그때를 회상하신다. 3명의 어린 아들을 두고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던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간절한 소망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X-레이를 찍으면 어머니의 한쪽 폐는 하얗게 나온다. 그런 어머니의 위중한 상태도 모르고 하루 종일 누워있는 어머니를 미워했던 기억은 내가 평생을 사는 동안 가슴속에 부끄러운 멍울로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30대 초반부터 부모님하고 동생들 가족 모두와 단체로 해외여행이나 제주도 여행을 가서 행복한 추억을 만들 거라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50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그 계획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지나고 보면 내가 인테리어 사업을 하여 통장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갈 수 도 있었는데 '조금만 더 모아서 더 좋은 곳으로 여행을 모시자.'라는 내 욕심에 지금까지 마음속에서 계획만 세우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수입이 별로 없어 힘드니 내년에는 꼭 백화점에 모시고 가서 옷 한 벌 사드려야지.'라는 생각도 해마다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부모님 칠순에 가평 펜션으로 가족 전체가 1박 2일로 여행 간 적이 있었다. 술에 취한 나는 술기운을 빌려서 거창하게 나의 계획을 이야기하자 부모님은 기뻐하셨지만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부모님 자신들에 대한 선물보다 형제들 간의 우애와 손자들이 아무 탈 없이 잘 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3명의 아들 모두가 서울에 번듯한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다. 특히 아버님은 나와 내 동생들과 형제의 우애를 더욱 강조하셨다. 그러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고 하셨다. 항상 마음속에서 어머니에게 효도 함께 해외여행도 가고 백화점에서 비싼 옷도 선물하고 호강시켜드리기 위해서 내가 목표한 경제적으로 풍족한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다가는 이미 늦어버릴지도 모른다. 시간이 멈출 수 없듯이 어머니도 내가 원하는 경제적 성공을 이루는 그날까지 멈춰서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어머니가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은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의 안부 전화가 아닐까? 어쩌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이를 확인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어머니 조금만 더 건강하게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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