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없는 감옥 같았던 시간들.
2020년 2월 한국에 잠깐 나갈 예정이었던 우리는 한국에 불고 있는 심각한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비행기를 취소를 하게 되었다. 어떤 바이러스도 착륙하지 못했다는 칠레이기에 코로나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유럽여행을 다녀와 코로나에 걸린 1명으로 시작된 코로나는 삽시간에 하루에 몇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이 걸리는 공포스러운 상황을 만들어갔다.
1월 말 우리는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두 아들이 맘껏 뛰어놓았으면 했고, 회사에서 관리비 지원이 안되기에 관리비가 아파트보다 저렴한 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행복한 미래를 꿈꾼 지 1주일 만에 코로나의 무서운 확산으로 우리는 집에서 나갈 수 없는 Lock down을 겪게 되었다.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고 이사하고 락다운이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다들 당황스러웠지만 초기 코로나는 매우 공포스러웠기에 학교도 멈추고, 남편들도 자택근무에 들어가게 되었다. 매일매일 뉴스로 상황을 살펴보며 불안했었고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은 밖을 다닐 수 있었고 일상이 그래도 가능했지만 칠레는 생각보다 통제가 심했다. 일주일에 2번 2시간의 통행권을 끊어야 마트를 갈 수 있을 정도로 그때의 상황은 심각했다.
특히 의료비가 비싼 나라라 코로나로 음압병동에 입원할 경우 막대한 병원비가 든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더욱 조심하고 조심했다. 그때의 동네는 죽은 도시 같이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 집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3월부터 시작된 코로나가 5월에 같이 식사한 한 가정이 무증상 코로나에 걸리게 되며 우리에게도 가까이 왔다.
미안해하는 당사자들의 마음이 어떨지, 타국에서 겪는 어려움이 얼마나 클까 싶어 우리는 매일 반찬을 해서 날라다 주었다. 그때부터 코로나 걸리면 늘 반찬을 해 다 주며 위로하는 우리만의 문화가 생겼다.
학교는 한국도 초기 혼란이 많았지만 칠레도 유튜브로 강의를 올리다가 몇 주 뒤부터는 바로 zoom으로 수업을 했다. 우리 아들들은 그 당시 9살, 7살이라 진짜 숙제도 엄마가 같이 봐줘야 하는 시기라 삼시 세끼에 아이들 수업, 숙제까지 챙겨야 하는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페파피그라는 만화를 봤는데 지금도 그 만화영화 노래를 들으면 그 당시 힘들고 당황스러웠던 감정이 생각나서 별로 듣고 싶지가 않다.
다행히 마당도 있고, 콘도에 나가 자전거라도 탈 수 있어 아이들은 덜 답답해했다. 그리고 형제라 같이 놀 사람이 있었기에 아이들은 그 시간을 잘 이겨내가고 있었다.
6월쯤 칠레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회사에서도 가족들의 귀국을 허용해서 남편을 제외한 우리 셋은 피난 가듯 칠레를 떠나 한국에 잠시 나왔다. 경유하는 공항에서 의자 앉을 때마다 소독하고 앉고, 비행기에서도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하니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한국에 와서도 코로나 검사에 2주 격리까지 험난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6월에 나와 11월 초에 다시 칠레로 들어갔는데 10월쯤에야 칠레 학교도 다시 학교에 나갈 수 있어서 칠레 도착하자마자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래도 상황이 안 좋아지면 다시 자택수업으로 돌입해 몇 주씩 집에서 줌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참 지금 생각해도 힘든 시간이었다.
애썼다. 고생했다. 전 세계의 엄마들.
모든 사람들.
칠레사람들은 마스크도 잘 쓰고 통행금지도 잘 지키는 편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칠레도 배달문화가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마트주문하면 30분 내 집 문 앞에 가져다주니 편했다. 점점 칠레도 상황이 나아져갔지만
교회도 1년 반을 못 갈 정도였으니 굉장히 통제가 심했다. 백신을 맞지 않고는 비행기 타는 일이 쉽지 않아 4차에 걸친 코로나 백신을 맞게 되었다. 3차 때는 맞고 매우 아팠기에 4차 맞는 날은 카레를 한 솥 끓여놓고 백신을 맞으러 갔다.
아프면 밥도 못하니. 참 애처롭지 않은가?
이렇게 힘들게 코로나를 겪어냈고 다행히 우리 가족은 칠레에서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칠레의 삶 속에 큰 이슈로 기억될
코로나바이러스.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농담으로 "2020년도는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글을 쓰다 보니 그때의 힘들었던 기억이 많이 흐려진 느낌이다. 힘듦보다 가족과 함께한 추억, 지인들과의 나눔, 온라인에서 깊어졌던 귀한 나눔들이 더 기억나는 걸 보니 그 시간도 또 의미 있었구나 싶다. 하지만 다시는 우리에게 그런 가혹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