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과 새벽의 성취감(01)
수영은 이른 나이에(?) 배웠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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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여행 제한이 풀리며 동남아 부부 여행을 다녀왔던 부모님은 90년에 당시로서는 큰 계획을 세웠다. 나를 포함한 미국 가족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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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지만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 진행했던 미국인 선교 장학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미국 미네소타의 주립대 교수인 분과 1:1 매칭이 되어 학비와 옷, 신발, 문구 등 생활용품을 지원받았다. 정확한 풀 네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그분을 편의상 빌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특이하게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영문 필기체를 능숙하게 쓸 줄 아는데, 어릴 적 당시 학교에서 배운 내용들과 안부 등을 편지로 써서 빌 할아버지에게 보내면 학비와 학용품, 옷 등을 엄마에게 보내주고 엄마는 다시 감사편지를 써서 보내드렸다고 한다. 필기체는 그때 익힌 것이다. 대학교 졸업 후에도 편지와 전화를 통한 왕래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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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세월이 흘러 학비를 지원해 주던 부산의 소녀가 덕분에 잘 교육받고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다. 아이들도 태어났다. 빌 할아버지는 특히 나를 보고 싶어 했다.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은인을 다시 찾아뵙기 위해, 과시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꿈과 같은 미국 가족 여행을 위해 그렇게 미국행을 결정했다. 나의 동생 정민 군은 당시 갓난아이였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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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나는 김포에서 하와이행 비행기를 탔다. 빨강과 파랑의 W 로고가 꼬리 날개에 새겨진 유나이티드 항공이었다. 초등생 이하 어린이들에게는 비행기와 마스코트 캐릭터 모양들을 색칠할 수 있는 컬러북과 크레파스를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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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행의 처음 열흘은 하와이, LA,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뉴욕 등을 관광하는 단체 패키지여행이었고 이후에는 우리 가족의 개인 일정으로 미네소타 빌 할아버지 댁에 열흘간 머무는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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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로 가는 단체 패키지의 첫 여정 중 비행기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누다 알게 되었는데, 나와 동갑인 데다 똑같이 대구에서 왔던 친구가 있었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모두 그렇듯 우리는 순식간에 친해졌다. 함께 컬러북을 색칠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만화 이야기도 하며 서로의 공통점으로 더욱 가까워졌다. 다만 우리에게는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수영이었다. 나는 수영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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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할아버지와 부인인 메리 할머니는 엄마에게 하와이 해변뿐만 아니라 호텔 곳곳에서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미네소타 집에서도 수영을 즐길 일이 많을 테니 꼭 수영복을 챙겨 오라고 했었다. 엄마는 나에게 파란색과 노랑, 주황 패턴이 섞인 아레나 수영복을 사주었다. 문제는 나는 수영을 배운 적조차 없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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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호텔 야외 수영장이 그렇듯 우리가 머물렀던 하와이 호텔도 완만한 경사의 계단으로 걸어내려 가 풀에 들어가는 구조였다. 대구에서 함께 왔던 그 친구는 꽤 배운 듯 수영을 능숙하게 하였다. 나는 물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장자리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친구가 발차기도 하지 않고 팔을 휘젓지도 않는데 물속을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 키로도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인 줄 착각하고 나는 물에 풍덩 뛰어들어갔다. 헉, 그런데 너무 깊은 1.5m 풀이었다. 나는 허우적대고 목구멍으로 물이 들어가며 컥컥거렸다. 1.5m 풀은 역시 수영을 못하던 엄마에게도 깊은 곳이라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엄마는 “헬프미! 헬프미!”를 외쳤고 근처에 있던 흑인 아저씨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코와 입으로 수영장 물을 쏟아내며 흑인 아저씨와 눈을 마주쳤는데 뭐랄까….. 나를 좀 불쌍하게 바라본 듯한 그런 눈빛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을 많이 마시고 겁에 질린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울면서 호텔방으로 돌아갔다.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대구 친구를 계속 바라보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발차기도 하지 않고 팔도 휘젓지 않으며 유유히 물속을 돌아다닌 그 아이는 평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뭔가를 못한다는 것은 곧 부끄러움을 의미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지만 당시의 나는 그랬다.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 이런 마음가짐은 훗날 자라면서 나에게 약이 되기도 했지만 때론 독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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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할아버지 메리 할머니 말씀대로 우리가 가는 곳마다 멋진 수영장들이 가득했다. 수영장 물만 봐도 겁에 질렸던 나는 들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미네소타의 집에도 작은 풀장이 있었는데 당연히 들어갈 수 없었다. 호텔 수영장과 달리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절대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사실 그런 건 필요 없었다. 나 스스로도 수영장 근처는 얼씬도 하기 싫었으니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다소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봤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엄마와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2학년 애가 왜 수영을 못하지? 그럼 물에 빠지면 쟤는 어떡해?”
“그래서 물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해요(?).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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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고 귀국 후 엄마와 나는 나란히 당장 동네 수영장 강습을 등록하였다. 내 수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