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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Aug 10. 2024

말보다 강한 침묵

소중한 건 늦게 깨닫는다

사촌오빠의 딸이 결혼식을 올렸다.   

아빠의 장례식 때 매일 찾아와 챙겨줬던 오빠이기에 흔쾌히 참석하기로 했다.


멀리서 아빠의 손을 잡고 서있는 오빠의 딸을 보며 문득 20여 년 전 저렇게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내 옆에는 아빠 대신 사촌오빠가 서 있었다.


아빠는 당신의 장애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될 것을 우려하셔서 신부입장을 극구 거절하셨다. 식구들은 암묵적으로 그런 아빠의 의견을 존중해서 당시 아빠와 비슷한 연배의 사촌오빠가 내 손을 잡고 입장해 다.  


결혼식 전날, 나는 차마 을 못 이룬 채 어슬렁 거리며 담배를 피우던 창밖의 아빠 모습을 보았다.

하필 집안의 사업이 기울어서 반지하 집으로까지 밀려난  형편 속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나마 내가 좋은 직장을 다니고 엄마가 비상금을 털어 주셔서 간소하게나마  혼수는 장만했지만, 어려운 형편에 풍족히 뒷바라지를 못해주는 게 미안해서인지 부모님은 나에게 몇 번이고 결혼을 미루면 안 되겠냐 물어보셨다.


남편 집도 그리 여유 있는 편이 아니어서 대출을 끼고 조그만 빌라 전세를 얻었는데 부모님은 그런 형편이 못내 마음에 걸리시는 눈치였다. 그러나 장남인 남편의 집에서 결혼을 서둘렀으면 하시는 바람에 우리는 각자의 형편에 맞춰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당시 남편과 나는 둘 다   회사에 다니는  맞벌이였다. 막상 결혼을 해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남편과 나는 성격상 별로 맞는 게 없었다. 연애 때는 그 차이가 신기해서 함께 하면 재미있었건만 막상 결혼하니 그 차이 때문에 허구한 날 퇴근 후에는 피곤을 무릅쓰고 악착같이 싸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나름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보통 싸우는 날에는 각방을 쓰다가 다음 날 출근을 했다. 그런 사소한 날들이 반복되자 차츰 싸움 뒤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하루는 싸움 뒤 짐을 싸서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에 들어가니 엄마는 일하러 나가시고 마침 아빠 혼자 집을 보고 계셨다. 아빠는 결혼한 딸이 저녁때 짐을 싸서 온 모습을 보시고 입을 쩍 벌린 채 황당해하셨다.


마침 우리의 결혼 전 IMF 가 터졌을 때, 남편이 잘 다니던 대기업 직장을 나오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피웠었다. 그때 결혼할 남자가 직장을 그만둔다니 어쩌면 좋냐는 나의 호소에 아빠는 잠자코 있다가

한 마디 하셨다.

"그런 사람이면.... 다시 생각해 보렴."


그때 아빠의 말을 남편에게 전해줬을 때 남편은 예비 장인의 의외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마침 퇴사를 만류하는 팀장의 말에 순순히 응해서 직장에 남았고  덕분에 20년 가까이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다.


그렇게 사위에 대한 나름의 인식을 갖고 있던 아빠이기에 딸이 남편과 다툰 뒤 못살겠다고 짐을 싸가지고 집으로 들어온 날, 아빠가 화를 내거나, 한 마디라도 역성을 드실 법도 하건만 끝내 아무 말씀도 없이 조용히 계시는 거였다.


그날 나는 아빠와 나란히 앉아서 tv를 보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틈틈이 분노에 차서 남편에 대한 흉을 조금씩 흘렸다.   그때마다 아빠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상념에 잠기신 게 느껴졌다.

결국 그날 밤, 나는 밤늦게 돌아온 엄마를 만나기 전 민망한 마음으로 친정집을 나섰다.


딸의 안색을 살피며 일부러 아무 말씀 없이 묵묵히 곁을 내주셨던 아빠를 향한 미안함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는 수 차례 더 싸웠고, 나는 친정집으로 몇 번 더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온 딸을 아빠는 항상 말없이 푸근하게 맞아 주셨다. 어떤 잔소리도, 비난도, 캐물음도 없었다.


그저 내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편안하게 머물다 가도록 당신 딴에는 최대한의 배려를 해주셨다. 나는 친정집에 찾아갈 때는 혼자 분을 삭이며 씩씩거렸건만 막상 집을 나설 때는 아빠와 함께 두런거린 시간을 통해 감정을 추슬러서 나오곤 했다.

그때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당신의 맏딸이 없는 형편에 만류하는 결혼을 한 뒤,

잘 사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지지고 볶다가 뽀르르 친정집에 달려올 때마다 혼내거나 잔소리를 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아니면 차마 보기에도 안쓰러워 그냥 내버려 두신 걸까.


한동안의 방문 이후, 나는 더 이상 친정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우리의 싸움이 끝났다기보다는 더 이상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때의 격렬한 싸움이 서서히 진화되면서 우리의 결혼생활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친정집에 찾아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내 발목을 잡기도 했다.


사촌 오빠 딸의 결혼식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저렇게 부신 미소를 짓는 저 부부도 예식이 끝난 뒤 돌아가서 격렬하게 싸우고, 힐난하고, 괴로워할 날이 있겠지.

 그런 때마다 저 아이도 지금 자신의 손을 맞잡고 들어간 아빠가 계신 친정집으로 달려갈까.  


이제 더 이상 남편과 나는 싸우거나 부딪히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우리 둘은 많이 늙었고, 지치고, 바빠졌다.


 지금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때 자기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며 한 짐 가득 들고 들어온 딸을 보며 화내고 야단치거나, 잘 왔다고 역성 들어주는 아빠였다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빠의 그 침묵이 내게 더 많은 말들을 건네줬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형편에 욕심껏 잘 챙겨주지 못하고 시집보낸 딸.

행여 내 딸이 그로 인해 상처받지 않았나, 그로 인해 힘든 건 아닌가, 속으로 얼마나 무수한 생각들을 하셨을지 세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되고서야 나는 겨우 눈곱만큼  그 심정을 헤아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깨닫는다.

그 심정을 헤아리는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부모님은 그리 흔치 않음을.


때론 침묵이 말보다 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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