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를 치른 이후 어언 3개월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가장 극심하게 슬픈 기간이 1개월 정도이며 그 이후부터는 슬픔의 정도가 조금씩 약해질 거라 얘기해 줬다. 그 한 달간 슬픔이 거의 매일 찾아왔다면 한 달이 지나가면서부터는 2-3일에 한 번 찾아오는 것 같다. 슬픔은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라 느닷없이 불시에 찾아오는 손님으로 변해간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 이미 죽음을 대비한 준비를 하셨기에 재산조회를 해도 남겨놓으신 것이 없었다. 청약통장 하나와 아빠 명의로 된 차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에 도리어 정리가 수월해져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망신고와 재산조회를 하면서 아빠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통장금액이나 자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친정집에서 지내는 큰아들 환이의 삶이 바뀌었다.
환이는 3월 개강과 동시에 외갓집에 들어가 살면서 할아버지가 겪는 투병의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도와 드렸다. 할아버지가 필요로 할 때마다 몸을 움직이거나 일으켜 드렸고 화장실로 옮겨 드렸으며, 변비로 고통스러워할 때는 할아버지의 관장을 직접 도왔다. 그래서인지 장례식 때 하나같이 눈물바다를 이룬 7명의 손주와 1명의 손녀들 사이에서 환이는 유독 눈이 벌게지도록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할아버지의 입관일 때 환이는 할아버지를 향한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할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할아버지가 저 찾고 심부름시킬 때 속으로 귀찮았던 적이 많았거든요. 죄송해요. 지금 생각하니 너무 후회돼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드릴걸... 누구보다 할아버지가 제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장례식 때 부의금 접수하는 일을 맡아서 책상을 지켰던 환이는 한 번도 자리를 비우거나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목석처럼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 영정사진을 들고 듬직한 모습으로 산소까지 따라갔다.
돌아와서 환이는 할머니 집에서 곁에 남아 말벗이 되어 드리고 할머니가 필요로 하는 집안일들을 묵묵히 도와드렸다. 그리고 주말에 집에 돌아오면 예전에 비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그것이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맏손주 환이를 위해 남겨준 가장 큰 유산임을 직감했다.
두 번째로는 나의 가치관의 변화이다.
아빠를 떠나보낸 이후, 나는 삶의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전에는 당연하게 여기며 무심히 보냈던 순간들.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고, 아침마다 배웅하고, 엄마께 안부전화 드리는 일과들이 이전에 비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 삶에서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누리리라 날마다 다짐한다.
이제라도 삶의 여유를 갖고, 홀로 남은 엄마, 어머님과 가끔씩 밖에 모시고 나가 외식도 하고, 소소한 여행도 하고, 자주 찾아뵙고 싶다. 예전에는 꼭 무언가 되고 의미 있는 일들을 하고, 돈벌이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삶의 중요한 가치들에 집중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들이 예전보다 더 끈끈하게 하나로 연대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 키우고,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도 소원했던 세 자매가 아빠의 죽음을 겪으며 부쩍 자주 연락하고 마음을 나누게 되었다. 엄마를 찾아뵐 때도 지나온 추억을 회고하면서 우리가 더 깊은 사랑으로 연대함을 느끼곤 한다.
한 사람의 장례식은 산자에게 남기는 메시지라고 이재철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아빠는 하늘나라에 가시며 우리에게 이렇게 인생의 중요한 가치에 집중하고, 가족이 하나 되어 살라는 메시지를 당신의 죽음을 통해 남겨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