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말하셨다. 인생을 즐겨라, 그리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니 늘 활기차게 많은 것들을 도전하고 해 봐라. 이미 즐길 것은 초등학생 때 다 해봤다고 생각했고, 이미 힘들어 죽겠는데 뭘 더 해보라는 거야!라는 마음이 저 아래에서 올라왔다. 내색은 하지 않았고, 당연히 저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책은 정말 단 한 번도 펴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인 게 아니라, 인생은 늘 힘든 거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인생을 살았다. 불안감이 내 인생을 조절하는 하나밖에 없는 키였기 때문이다. 시험 기간이 되면 위가 작아져 살이 5킬로 이상 빠지는 것은 부지기수였고, 잠도 4시간가량 자고 나면 눈이 떠졌다. 그런 상태를 생각보다 스스로는 사랑했다. 어쨌든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 그걸로 내 인생은 망하지 않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기말고사 기간 시험공부를 하다 새벽에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날도 어김없이 밤을 새우기 위해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8시간 후면 생물학 시험이 있었고, 영어로 하는 수업이었기에 모든 장기의 명칭, 유전자 복제 메커니즘에서 사용되는 효소명 등을 영어로 외워야 했다. 영어를 극도로 싫어했기에 스트레스를 받던 나는 갑자기 윗배가 아파짐을 느꼈다. 배고파서 그런가 싶어 우유를 먹고, 물도 마시고, 타이레놀도 까먹었다. 피곤한가 싶어 누워 자려하는데, 더 심해지는 통증에 결국 택시를 잡아타고 근방의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진단명은 위경련이었다. 손에 시험 범위 프린트를 꼭 쥔 채 링거를 맞고 시험 준비를 했다. 결국 그날 있었던 모든 시험은 말아먹었다.
위경련이라는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생겨서 안도감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내게 시험성적은 그저 보일 예쁜 감투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분명 생물을 좋아하는 것이 맞았다. 아니, 나는 과학을 사랑했으며 그가 쥐여주는 색다른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그야말로 황홀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불안감에 묻혀버린 지 오래였다.
어느 날, 대학교 3학년 때쯤이 되어서 하루는 이모가 말씀하셨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 알지? 노력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못 이기는지 알아? 바로 즐기는 사람이야. 너도 네가 좋아하는 걸 즐기면서 하면 좋겠다!” 좋아하는 걸 참아가며 하는 것이 공부고 인생이라 여겼기에 맞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나와는 관련이 없는 얘기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즐기며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심리학을 조금씩 배워가고, 또 조언도 구해가며 살던 어느 날 한 상담사님이 내게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한번 찾아보면 어때요?”라며 방법을 제시하셨다. 그 질문이 그렇게 나를 뒤흔들어놓을지 꿈에도 몰랐다. 수시로 화가 났다. “언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거에 관심이 많았다고? 이제 와서 물어봐? 어차피 다 못 한 게 할 거잖아!” 분노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 스스로 이 상태가 너무나 의아했으나, 반동형성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행을 너무 가고 싶었다. 새로운 곳, 음식, 경험이 고팠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하고 싶지 않을 것을 참으며 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을 즐기라는 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속에는 그저 끌려가는 인생이 아닌 내가 선택해서 성장하는 인간에 더 가까웠다. 참 재밌는 사실은 그 말을 하는 어른 중 정말 자신이 선택해서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 증거는 일터를 가고 싶지 않아 했고, 한숨이 꽤 컸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는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 간절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내가 선택해서 멋지게 즐기며 사는 인생이 그리워했다. 그렇기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라는 말을 생략한 채로. 내가 너무 늦게 알아버린 이 사실을 너에게 말하니, 너만은 일찍부터 좀 힘들지라도 누리며, 즐기며 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