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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아빠 Aug 30. 2022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작가 미상)

장례식은 형식보다 슬픈 마음이 우선입니다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임방이 예의 본질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검소해야 하며, 장례식은 형식보다 슬픈 마음이 우선입니다."  

(팔일편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與其奢也寧儉 喪與其易也寧戚 임방문예지본 자왈 대재문 예여기사야영검 상여기이야영척)


 주부명절증후군이란 병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병입니다. 이 병은 친척들이 모이는 설날과 추석 같은 명절 직후에 과도한 집안일로 인해 주부의 몸과 마음에 이상이 생기는 증상을 말합니다. 이때 여성들이 원망을 하는 대상 중 하나가 유교입니다. 차례상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고단한 과정이 유교의 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러한 문화가 공자나 혹은 유교와 연관이 있을까요?


 우선 위의 《논어》 구절을 읽어보면 공자는 검소함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특히 그는 죽은 가족을 위한 장례식조차도 슬픔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본래 본문에는 장례가 아니라 상례로 나와 있습니다만 요즘에는 상을 치르는 상례와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장례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기에 통상적으로 쓰이는 장례식이라는 단어로 대체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과 더 이상 함께 지낼 수 없다는 비통함과 살아 있을 때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장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공을 들였습니다. 공자가 장례를 언급한 이유는 그 당시에도 슬픔보다 겉치레에 신경을 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공자는 예의 본질이 태도와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논어》에는 장례식을 간소하게 진행하는 일화가 몇 가지 나옵니다. 공자가 아들의 장례를 치를 때 관을 간소하게 준비했다거나, 자신이 위중한 병에 걸리자 분에 넘치는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고 언급하는 장면 등이 대표적입니다. 《논어》의 한결같은 맥락으로 볼 때, 공자는 복잡하고 어려운 차례상에 대한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차례상이 화려해진 것일까요?


 조선의 예식은 대부분 《주자가례》라는 책으로부터 전해졌습니다. 《주자가례》는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만들었고, 고려 말에 유입되었습니다. 주내용은 성인식, 결혼식, 장례식, 제사 등에 관한 가정의 예법입니다. 조선은 주희가 정리한 예법을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주희가 남겨놓은 말과 글은 절대적인 추종의 대상이었습니다. 사회가 고착화될수록 함부로 주희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조차 금지될 정도였습니다.


 《주자가례》를 보면, 주희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명절 제사는 소제(간소한 제사)로 집안의 사당에서 지내며, 두 가지 음식만 올린다.(俗節小祭 只就家廟 止二味 속절소제 지취가묘 지이미) 차례상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명절에는 두 종류의 제철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차례라는 용어도 간단하게 차(茶)를 위주로 바치는 풍습 때문에 생긴 용어입니다. 즉, 차례에서 중요한 건 음식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차례는 제사와 혼동되고 양식이 바뀌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 푸짐하게 음식을 준비하던 제사상과 차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비슷하게 변했습니다. 그러니 엄격하게 유교적 문화를 따른다면 명절의 차례상은 간단해야 합니다. 심지어 주희는 사치를 부리는 장례는 악습이라고 말하며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설과 추석 같은 명절에 지나친 음식 준비와 처리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본래의 유교적 예를 따라서 간소하게 바꾸든지 아니면 상식적이고 효율성 있는 현대적 방식으로 개선하면 됩니다. 명절은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나 친척들과 반갑게 안부를 주고받는 태도와 마음이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그 무엇도 화목한 가정보다 중요할 수 없습니다.


 예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라는 기본적인 뜻 이외에 예식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본래 예(禮)라는 단어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서 나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추수의 기쁨과 감사의 의미가 담겨 있는 추석이 고대부터 내려오는 대표적인 제사의 명절입니다. 지금의 ‘禮(예)’와 같은 뜻으로 쓰였던 고대의 한자 ‘豊(예)’는 그릇(豆) 위에 곡식(曲)이 담긴 형태로 구성된 상형문자입니다.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제사 예식이 사람 간에 지켜야 할 규범 같은 뜻으로 확대된 셈입니다. 따라서 예를 안다는 것은 예식의 전문가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자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물어볼 정도로 박식한 예의 전문가였습니다. 그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예식은 검소함과 마음이 중요하다고......




〈명황후 국장도감의궤〉는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의궤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조선의 독특한 기록물입니다. 그림과 글을 통해 행사의 형식과 구조 그리고 복식과 도구들까지 꼼꼼하게 기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입니다. 의궤는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진가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명황후 국장도감의궤〉의 그림을 보면, 누가 어디에서 무슨 복장으로 있었는지 글을 읽지 않아도 상세히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무참히 암살당한 비운의 왕비였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서두르기 위해 왕비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와는 상관없이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 될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은 외교관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경찰, 군인, 신문기자, 작가, 의사 그리고 낭인들까지 모여 경복궁에 쳐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치밀한 전략으로 비교적 손쉽게 왕비의 암살 작전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일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사실 왕비의 암살 사건은 조선인 협력자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만행이었습니다. 그 당시 경복궁에는 1,500여 명의 군인과 40여 명의 장교가 주둔하며 왕과 왕비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웬만한 병력으로는 쉽게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경복궁 외곽과 서울을 지키던 군대였던 훈련대를 포섭하여 일본인과 함께 왕비의 암살 작전에 동참시켰습니다. 그리고 사건 발생 직후에 조선의 법정은 명확한 증거 없이 이주회, 윤석우, 박선 등을 죄인으로 판결하였고 6일 후에 바로 처형하였습니다. 범행에 가담했던 일본인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는 절차였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일본의 만행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내부에서 암살 사건의 계획을 묵인하거나 동조하고, 직접 동참했던 조선인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했습니다. 우리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은 사건에 관계된 조선인입니다.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고 외세의 침략을 환영하며 이익을 탐했던 무리들입니다. 왕비의 시신은 끝까지 찾지 못했는데 경복궁 안에서 불에 태웠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리고 왕비의 국장은 시신 없이 암살된 후 2년이 지나서 고종이 친일파 관료들로부터 벗어난 다음에야 마무리되었습니다.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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