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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아빠 Aug 29. 2022

대사례도 (작가 미상)

군자는 다투지 않는다

대사례도(大射禮圖) 중 어사례도(御射禮圖)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활쏘기는 과녁을 맞히는 것이지, 과녁을 뚫는 것으로 능력을 평가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힘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옛 활쏘기의 도리다. 

(팔일편 射不主皮 爲力不同科 古之道也 사부주피 위력부동과 고지도야)


 화살로 멀리 떨어진 과녁을 맞히기 위해서는 집중력과 반복된 훈련이 필요합니다. 활쏘기는 누구나 가능하지만 처음부터 잘 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선 활과 화살의 구조 및 원리를 이해하고, 자세를 익히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제대로 배우지 않고 서두르다가는 다칠 수도 있습니다. 활쏘기의 본질은 정확한 자세와 안정적인 마음가짐입니다. 둘 중에 무엇이라도 흐트러지면 과녁을 제대로 맞히기 어렵습니다. 위 구절은 바로 이와 같은 활쏘기의 본질과 삶의 도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즘엔 선비라고 말하면 조선 시대의 양반이 가졌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책만 들여다보던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 유래된 단어인 선비는 본래 정치가나 전략가라는 의미의 문신보다 군인에 해당되는 무신 혹은 무사에 더 가까웠습니다. 전쟁이 일상화된 시대에서는 영토를 지키고 확장하는 군인들의 역할이 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군인을 뜻하는 ‘병사(兵士)’와 ‘군사(軍士)’라는 단어를 보면 모두 ‘선비 사(士)’가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고려를 세운 왕건과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모두 무신 출신입니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 귀족으로 태어나면 전투와 관련된 교육이 필수였습니다. 당시 전쟁은 귀족들의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미리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 마차를 타고 활을 쏘며 싸웠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군사력이고, 제후들은 잘 싸우는 귀족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귀족들은 전쟁에 참여하여 자신의 가치를 높이거나 증명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귀족의 자제들은 육예(六藝)라고 불리는 여섯 가지 필수 과목을 배웠습니다. 육예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하는데, 이는 예절, 음악, 활쏘기, 마차몰기(말타기), 글쓰기, 산수 등을 말합니다. 이 중에서 활쏘기와 마차몰기가 바로 전투 교육에 해당됩니다. 요즘과 비교하면 활쏘기는 사격이고, 마차몰기는 운전에 해당됩니다. 


 《논어》에는 활에 대한 얘기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군자는 다투지 않는다. 만약 다툼이 있다면 오직 활쏘기일 뿐이다.'(팔일편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군자무소쟁 필야사호)라든가 ‘공자는 사냥을 하지만 잠든 새는 쏘지 않았다.'(술이편 弋不射宿 익불사숙)는 구절 등입니다. 따라서 공자를 포함한 그의 제자들도 기본적으로 활쏘기를 익혔고, 종종 함께 어울려 활을 쏘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활은 선사 시대부터 근대식 총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사냥과 전쟁에 쓰였기 때문에 인류의 생존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구입니다. 그 영향력으로 아직까지 올림픽에도 양궁이 있고, 우리나라도 전통 활쏘기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에는 전통 활쏘기가 가능한 활터가 대략 400여 곳이나 됩니다. 활쏘기에서 유래된 말도 다양하게 확장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본래 활쏘기의 표적을 말하던 관혁(貫革)은 과녁으로 바뀌어 사격을 포함한 각종 스포츠에서 사용 중이고, 과녁의 정 가운데를 말하는 정곡(正鵠)도 핵심이라는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습니다. 또, 전쟁의 시작을 알렸던 용도로 사용했던 소리가 나는 화살 효시(嚆矢)는 처음이나 근원이라는 뜻으로 사용 중입니다. 


 대사례는 왕과 신하가 모여 함께 활쏘기를 하던 행사였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천자가 활쏘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왕이 직접 대사례를 주관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살펴보면 대사례는 성종 8년(1477년)에 처음으로 시행되고, 정조 6년(1782년)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잘 쏘는 사람에는 상을 주고 못 쏘는 사람에는 벌로 술을 마시게 했다고 합니다. 대사례는 단순한 활쏘기 시합이 아니었습니다. 국방력의 근간이 되는 무예를 존중하고,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취지로 진행되었던 공식 의례였습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왕권의 강화나 신하들과의 친목을 도모하는 정치적 목적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위 그림은 영조 19년(1743년)에 시행되었던 대사례를 기록한 그림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인데, 같은 내용으로 고려대 박물관, 연세대 박물관, 이화여대 박물관에 각기 다른 이본이 남아있습니다. 그림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왕이 활을 쏘는 〈어사례도(御射禮圖)〉, 신하들이 활을 쏘는 〈시사례도(侍射禮圖) 〉, 성적에 따라서 상과 벌을 받는 〈시사관상벌도(侍射官賞罰圖) 〉 등입니다. 〈대사례도〉는 당시의 행사의 내용과 규모를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이와 같은 기록화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글이 전해주지 못하는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대사례도〉에서 가장 흥미로운 존재는 악단입니다. 활과 음악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대사례에서는 악단의 연주에 맞추어 활을 쏘았다고 합니다. 왕이 직접 활을 쏘는 행사여서 그런지 악단의 규모가 작지 않습니다. 왕과 신하는 각기 다른 과녁에 화살을 쏘았습니다. 왕의 과녁은 빨간색이고 가운데에는 곰이 그려져 있으며, 신하들의 과녁은 파란색이고 가운데에 사슴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사례도〉에는 왕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이유는 왕이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에 함부로 그 모습을 그리지 않았던 관습 때문입니다. 이날 영조는 4발의 화살을 쏘아서 3발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대사례도 중 시사례도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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