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
요즘엔 그럴 일이 많이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자기소개란에 '종교'를 적어 넣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의 부모님이 불교 신자여서 나도 따라서 ‘종교’ 란에 ‘불교'를 쓰곤 했다. 불교 외에 다른 종교에는 또 무엇이 있고, 내가 종교로 삼고 있는 불교라는 것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큰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말이다.
하느님? 예수님? 그게 누군데?
유치원에서 배우던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가사가 왠지 교회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괜한 반발심이 들어 친구들보다 더 큰 소리로 "부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교회에 다니는 학교 친구들은 종종 알록달록 예쁘게 코팅된 초대장을 가져와 돌리며 자기네 교회에 놀러 오라고 했다. 나는 자라면서 점점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 궁금한 마음이 생겼다.
12월 초가 되면 온 나라가 들썩거리도록 캐럴이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데 전 세계인이 흥분한다. 착한 아이들에게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까지 주고 가시다니! 석가탄신일에 절에 가면 스님들이 누룽지맛 알사탕을 나눠주시는데, 그거랑은 차원이 다른 환상적인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나는 교회를 안 다녀서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지 못할까 봐 조금은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도 나름 공휴일이고 축제 분위기이긴 한데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
<나 홀로 집에>를 보면 미국 사람들은 모두 다 교회에 다니는 것 같은데 미국엔 절이 없나?
왜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배우나 가수들은 하나같이 수상 소감 끝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눈물을 흘리는 거지?
세상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천구백구십몇년 하는 연도조차 예수님의 탄생부터 꼽은 것이라는 걸 알고는 꽤나 충격을 받았다. 물론, 절에서 본 달력에는 '불기(佛紀)몇천몇백몇십몇년' 이라고 별도의 연도를 표기하고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병기'에 불과했다. 아이들의 생일은 모두 양력인데, 어른들의 생신은 음력이라서 매년 헷갈리는 것처럼 불기로 연도를 말하는 것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요즘 트렌드는 불교가 아니라 기독교가 아닌가 하는 불편한 깨달음이 슬금슬금 내 안에서 커졌다.
집에 있던 위인전 전집 세트에서 석가모니와 예수를 찾아 읽고 난 뒤에는 약간의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 이순신 장군이나 유관순처럼 이 분들도 각 나라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아서 신격화된 인간인 거였구나 ‘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나라 밖의 다른 문화권에서는 힌두교, 이슬람교 등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종교를 믿기도 하고 그것을 나라에서 법으로 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즈음에는, 내가 이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종교관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어린이들은 무엇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할 때 마지막에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 이렇게 네 분을 모두 호출하고는 했는데 어쩌면 다양한 종교에 대한 아이들의 열린 마음가짐을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으니 말이다.
내 종교의 변천사
어렸을 때 별다른 고민 없이 '종교 : 불교'를 적어 넣던 나는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무교'라는 좋은 낱말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추상화에 붙은 제목 ‘무제’처럼 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부모님을 따라 절에 가서 그 향기를 맡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스님들과 좋은 이야기 나누면서 맛있는 비빔밥을 먹는 시간을 좋아했기에 '불교적 색채를 띈 무교' 또는 '친불교적 무교' 등으로 내 종교를 정의 내리곤 했다.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동기들과의 커뮤니티 카페에서 '100문 100답'이 유행했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100가지 질문을 붙여 넣기 한 다음, 나의 답변을 적당히 작성하고 다음 타자를 지목하는 게 기본적인 룰이었다. 거기에는 이름, 장점, 취미, 특기등과 함께 '종교'라는 항목도 있었다. 어차피 질문은 뒤로 갈수록 ‘이상형, 연애경험, 고백 횟수…‘ 이런 식으로 더욱 흥미진진해지기 때문에, 대부분 기독교/천주교/무교 중 하나를 골라 비교적 간단하게 적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날도 무심하게 스크롤을 내리며 앞부분을 대충 훑어보던 중이었는데, 한 친구의 신선한 답변이 눈에 들어왔다.
종교 : 부처님 팬입니다요.
단순히 '불교'가 아니라 '부처님 팬'이라니.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절에 가곤 했던 나에게는 그 답변이 재치 있으면서도 '주체성을 가진 불교인'으로 느껴져서 멋져 보였다. 나도 스스로 종교에 대한 고민을 하고 어떤 팬심 같은 것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게 그쯤이 아니었을까?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은 대학에 와서도 기독교 동아리에 가입해 종교와 관련된 활동을 일상에서 최우선으로 두고 활발하게 움직였다. 학교의 작은 규모의 비해 기독교 동아리는 서너 개가량이나 있었고, 비기독교인은 그 동아리들을 서로 구분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천주교 친구들은 동아리 없이 각자 알아서 성당을 조용히 다니는 듯했다. 학생회관 어딘가에 불교학생회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주변에 가입한 사람이 없기도 했고, 나는 다른 동아리 활동으로 이미 너무 바빴기 때문에 불교동아리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굉장히 신실해 보이고 자기들의 활동을 춤과 노래 등으로 활발하게 홍보하는 기독교
별다른 종교가 없어 보이지만 묵주반지를 끼고 있어서 물어보면 세례명이란 걸 갖고 있는 천주교 (대부분은 수줍어하며 열심히 다니지 않는다고 함)
소수민족처럼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어 보이지만 뭔가 마이너 한 느낌의 불교
각각의 개성이 느껴지는 세 가지 종교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을 느끼며,
나는 앞으로 어떤 종교를 선택하게 될까? 혹은 별다른 종교 없이 무교로 지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문득문득 하고는 했던 것 같다.
결국, 천주교?
자세한 이야기는 천천히 하겠지만, 나는 결혼을 계기로 천주교를 선택했고 최근에 본격적으로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천주교를 선택한 것인지, 천주교에서 나를 선택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나온 삶의 여정을 살펴보았을 때 마치 누군가가 '너는 그 길로 가거라' 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에세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최근 대한민국 종교 비율을 조사해 보았더니 위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
부모님께서는 어린 내 손을 잡고 절에 데려가시기는 했지만, 불교만이 진리라는 고정관념 같은 것은 심어주지 않으셨다. 하나의 종교라기보다는 어떤 문화 같은 느낌으로 내 삶의 전반에 묻어있을 뿐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내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무교의 비율이 월등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성당은 어떤 곳일까?
성당을 다니기만 하면 신자가 되는 것일까?
세례를 받기만 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
마음먹고 가기만 하면 성당생활이 시작되는 줄로만 알았던 무지한 나는 두 달이 넘게 기다린 끝에 드디어 '예비신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나처럼 성당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 또는 이미 성당에 대해 잘 알고 계셔서 내 글을 보며 애송이처럼 느끼실 분들과 나의 초심을 나누고 공감받고 싶어서 브런치 연재를 시작해보려 한다.
무엇보다 이 글은 다른 누구를 위함도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소소한 「종교일기장」의 첫 장이 될 것이다. 부디 내가 마지막까지 특정 종교에 대한 편견이나 배척 없이 쓸 수 있길 바라며, 읽으시는 분들도 불편한 마음 없이 따뜻함을 얻어가시기를 감히 욕심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