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추억
무더운 여름이었고, 에어컨 같은 변변한 냉방시설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산골짜기 바람이 시원해서 괜찮았다. 여름 캠프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가운뎃 날쯤에는 물놀이도 했던 것 같다. 멀지 않은 얕은 계곡에 가서 발을 담그는 정도였는데, 젊은 스님들이 아이들에게 물을 뿌리며 아주 즐겁게 놀아주셨다. 수영복을 입지 않고 그냥 수련회 티셔츠 차림으로 첨벙첨벙 놀다가 모두들 옷이 흠뻑 젖었다. 다시 해인사로 돌아오는 길에 다 말랐는지, 아니면 법당에서 수박을 먹으면서 다 말랐는지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젊은 스님들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간단한 노래와 율동을 따라 배우는 시간의 일이다. 어떤 스님께서 '산 할아버지'를 가르쳐 주셨는데, 별 것 아닌 동작도 개그맨처럼 과장되게 보여주셔서 수백 명의 아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적일 것만 같은 회색 승복 차림의 스님이 댄스 가수처럼 춤을 추시는 모습이 생소하면서 보기 좋았다. 펄럭이는 소맷자락은 마치 한마리의 백로가 날갯짓을 하는 듯 했다.
그분들은 사설 수련회에서 일하는 전문 강사처럼 다양한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하기도 하셨다. 익히 알고 있는 '가라사대 게임'과 앞뒤 아이들을 안마하다가 갑자기 간지럽히는 등의 흔한 내용이었지만 수백 명이 한 몸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처음으로 ‘일체감’이라는 것을 느끼고 조금은 오싹했던 나였다.
해인사에서 만났던 스님들에 대한 기억을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몇 해 전 TV에서 우연히 MBC스페셜을 보다가 생각이 났다. 거기에는 '무소유'로 유명하신 법정스님이 생전에 제자들을 만나며 삶을 정리하시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미 더 이상 간소하기 힘들 정도로 소박한 방.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물건까지도 다 주변에 나눠주시는데, 그 무거운 책과 장독 같은 것을 거뜬히 들고 나가 차에 싣는 건장한 스님들.
세상 점잖은 승복을 입고 활력 넘치게 움직이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맞다! 해인사 스님들이 저렇게 젊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그분들도 무척 젊은 데다 심지어 미남이셨던 것 같다. 의사로 치면 수련의 같은 위치였을 수도 있다. 교회 오빠나 성당 오빠만 있는 게 아니라 엄연히 '절 오빠'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왜 그땐 몰랐을까?
아마도 헤어스타일 때문이려나?
당시에는 의미를 잘 알지 못했지만, 수련회가 끝날 무렵 조금은 공포스러운 의식이 하나 있었다. 스님이 향불로 아이들의 팔뚝을 지지는(?) 것이었는데, 마치 학교에서 불주사 - BCG예방접종, 예전에는 학교에서 보건선생님이 접종을 해주셨던 - 를 맞을 때처럼 긴장되었다. 그리고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법명'을 지어주셨다. 가톨릭에서 쓰는 세례명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자비로운 느낌이 드는 세 글자의 법명이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고, 그때 엄마가 "너랑 정말 잘 어울리는 법명을 주셨구나." 하셨던 건 생각이 난다. 관련 용어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나서야 그때 했던 것이 '수계식'이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수계식 (受戒式)
의미: 불교에 귀의하여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음으로써 불자가 되는 의식.
내용: 삼귀의, 오계 수지, 연비, 법명 수여 등으로 이루어짐.
법명: 불교에 귀의하여 받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명(佛名) 또는 계명(戒名)이라고도 함.
연비 (燃臂) : 팔뚝을 태우는 의식으로, 깨달음을 위한 굳은 의지를 표현함. 팔뚝에 향불을 지지거나 초심지를 태우는 방식으로 진행. 육신의 고통까지도 감내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음.
해인사 홈페이지에서 작년 여름 수련회의 일정표를 찾아보았다. 2박 3일간의 일정 중에서 특히 가운뎃날의 것을 살펴보니, 새벽기상은 매우 이른 시각인 것은 여전하다. 예전에는 없었던 '대장경테마파크'라는 곳에서 견학 및 물놀이를 하는 것을 보니 그 장소가 가야산 계곡에서 테마파크로 옮겨진 듯하여 격세지감을 느낀다.
초등학생 시절,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은 이맘때가 되면 '여름성경학교' 초대장을 들고 다니며 교회에 놀러 오라고 했다. 예수님이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듯한 모습에 귀여운 꼬마들이 와글와글 안겨있는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주워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성경공부도 조금 하지만 맛있는 간식을 먹고 물놀이도 하고 단합대회처럼 여러 가지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거기 다녀온 친구들은 한동안 그들만의 추억을 곱씹으며 웃고 떠들었다.
우리 가족이 다니는 성당의 주일학교 학부모 단톡방에는 지난주에 공지사항이 하나 올라왔다. '여름신앙학교'라는 이름으로 성당에서 성경 공부, 율동 배우기, 물놀이 등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나이제한이 있어 첫째는 참가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보통 첫째와 둘째가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선호하기 때문에 신청을 잠시 망설였다.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아침부터 모여 성당 앞마당에서 물놀이도 하고, 친구들과 점심도 먹은 후 다 함께 4시 어린이미사에 참여하는 일정이었다. 단체티셔츠를 맞추기 위해 아이의 사이즈를 기입하는 란도 있었다. 공지의 내용을 다운받아 살피며 내 마음은 조금 복잡해졌다.
'그날 신앙학교에 간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똑같은티셔츠를 입고 올 텐데... 우리 아이만 빠지는 거면 어쩌지? 아침부터 있었던 일을 즐겁게 떠드는 모습을 멀뚱하게 보고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조금 전까지 나와 같은 이유로 신청을 보류하자던 남편에게 우리 아이도 여기에 보내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다. 어린 시절 나의 해인사 캠프 이야기도 들려주며 말이다. 아직은 서먹하게 지내는 성당 친구들과 한바탕 그렇게 놀고 나면 부쩍 가까워지고, 성당에 가는 일이 더 즐겁게 느껴지겠지? 어쩌면 전에는 몰랐던 신부님과 수녀님의 색다른 면모도 발견하고, 평생 함께 우정을 쌓아나갈 쏘울메이트를 찾는 기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가 여름 신앙학교를 마치고, 잘 익은 자두처럼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떠들어댈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 내 입가에 미소가 마중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