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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담 습작 02화

[쇼츠] 헌법의 그림자

by 기담

헌법의 그림자

베를린의 한적한 거리에 위치한 역사기록보관소.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회색빛 건물 안, 젊은 역사학자 요한 하이덴은 구겨진 문서를 손에 쥔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서독 기본법의 초안을 조사하던 중, 기묘한 기록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건... 말이 안 돼."

문서는 1949년 서독 기본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삭제된 조항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조항이 아니라, 거기에 서명된 이름들이었다. 정치인의 목록 사이에 뜻밖의 이름이 하나 있었다. '하인리히 프라거'. 그는 공식적인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요한은 본 대학에서 헌법학을 연구하며 독일의 헌법 역사를 깊이 파고들어 왔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하인리히 프라거'라는 이름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호기심이 점점 커져 갔다.

그날 밤, 그는 보관소에서 나온 후 곧바로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리고 인터넷과 도서관 기록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하인리히 프라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인물처럼.

"이 사람이 정말 실존했던 인물이라면, 대체 왜 기록에서 사라진 걸까?"

요한은 곧바로 자신의 동료이자 법학자 친구인 카트리나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베를린 헌법연구소에서 일하며 독일 헌법사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다.

"카트리나, 너 혹시 하인리히 프라거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 1949년 기본법 제정 당시 서명한 사람인데, 공식 기록에 전혀 존재하지 않아."

카트리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한, 그 이름... 절대 입 밖에 내지 마."

"뭐? 무슨 뜻이야?"

"예전에 연구 중에 그 이름을 본 적이 있어. 하지만 그 이후로 내 자료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심지어 내가 기록해둔 메모까지도."

요한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단순한 역사적 오류가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인물의 흔적을 지웠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극히 드물었다.

그는 더 깊이 파헤치기로 결심했다. 며칠 후, 그는 보관소의 더 오래된 문서를 조사하며 기묘한 연결고리를 발견했다. 하인리히 프라거는 1949년이 아니라, 1919년 바이마르 헌법 제정 과정에서도 등장했다. 같은 인물이 30년 넘는 시간 동안 존재한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1871년 독일제국 헌법 초안에서도 그의 이름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그는 대체 누구지?"

요한은 자신이 단순한 역사적 미스터리가 아니라, 독일 헌법사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비밀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연구실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요한은 문밖에서 미세한 발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불을 끄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선택해야 해. 이 비밀을 계속 파헤칠 것인가, 아니면 잊어버릴 것인가."

요한은 손에 쥔 문서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헌법의 그림자 속에 감춰진 진실을 밝혀낼지, 아니면 영원히 침묵할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독일 헌법 속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진실을 좇는 그림자

두 사람은 마지막 단서를 찾기 위해 베를린의 오래된 지하 기록보관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하인리히 프라거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어두운 지하실 문을 열자 먼지가 가득한 서류 더미가 보였다. 요한은 조심스럽게 서류를 들춰보다가, 한 장의 낡은 종이를 발견했다. "하인리히 프라거 - 보안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카트리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인리히 프라거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비밀리에 존재하는 독일의 그림자 정부, '제4위원회'의 설립자였다. 이 위원회는 독일의 법체계를 조종하며 헌법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건... 국가를 넘어서 세계적인 문제야." 요한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지하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검은 옷을 입은 남성들이 들어왔다. "여기서 멈춰야 할 겁니다, 교수님들."

카트리나는 요한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우린 선택해야 해. 도망쳐서 진실을 알리든지, 여기서 모든 걸 끝내든지."

요한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손에 쥔 서류를 꽉 쥐었다. 이제 그는 알았다. 진실은 항상 밝혀져야 한다는 것을.


그림자 속의 대결

카트리나는 지하 기록보관소를 빠져나와 베를린의 거리로 달렸다. 요한이 시간을 벌고 있는 동안, 그녀는 국제 언론과 접촉해 USB에 저장한 정보를 전달했다. 그 순간, 베를린 전역에 긴급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충격적인 폭로: 독일 법체계를 조종하는 비밀 조직, '제4위원회' 실체 드러나!"

한편, 요한은 지하실에서 검은 옷의 남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제 다 끝났어. 진실은 밝혀졌어."

남자들은 그를 응시했지만, 결국 총을 내리고 사라졌다. 그 순간, 카트리나가 경찰과 함께 들어왔다. "요한, 우린 해냈어."

독일 전역이 충격과 혼란에 빠졌지만, 이제 사람들은 헌법 속의 숨겨진 그림자를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은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정치적 구조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진실은 마침내 빛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올 미래는, 아직 미지수였다.


영원한 그림자

진실을 알리려는 노력은 결국 성공했다. '제4위원회'의 존재가 드러났고, 세계는 경악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요한과 카트리나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뉴스와 언론에서는 그들이 폭로한 진실을 연일 보도했지만, 정작 그들의 존재에 대한 기록은 점점 희미해졌다. 공식 문서에서도, 학계에서도, 심지어 인터넷에서도 그들의 흔적은 지워졌다. 마치 그들은 한때 존재했지만, 역사 속으로 흡수된 유령이 된 것처럼.

그러나 그들은 살아 있었다. 베를린의 한적한 마을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며, 그들의 존재를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이제 익명의 존재가 되었지만, 자유로웠다.

카트리나는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요한이 신문을 펼쳐 들고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사라진 것 같지만, 결국 사람들은 진실을 알게 되었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카트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고 우린 아직 살아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진실은 밝혀졌고, 세상은 변했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의 그림자로 남았지만,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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