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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검은 24화

검은 글씨

by 혜윰


깊은 밤, 적막이 외로움을 불러올 때면 그녀는 조용히 책을 펼쳤다. 외로움이 자신을 흔들지 못하게 책에 마음을 기댔다. 그렇게 무심코 빼든 책은 그녀의 마음을 투영한 듯 온통 검었다. 오직 책등의 글씨만 희게 빛났다.


표지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도드라진 것 하나 없는 미끈한 표면. 유광의 검은 글씨들이 무광의 검은 바탕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다가 중앙 아래에서 회오리처럼 줄어들었다. 마치 소리 없는 비명이 잦아들 듯. 고통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듯한 궤적. 어쩌면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펼치니 아무 글자도 없는 새빨간 종이가 그녀를 응시했다. 다음 장은 제목이 적힌 검은 종이. 적과 흑의 대비가 눈을 찔렀다. 그 뒤를 이은 건 검은 글씨를 품은 빛바랜 누런 종이. 마치 검게 물든 기억과 아직 낫지 않은 붉은 상처들, 생기 잃은 누런 일상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삶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글을 더듬어 나갔다. 글자를 쫓아 아래로 향하던 눈이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오기를 몇 번. 그제야 책장이 스르륵 스르륵 넘어갔다. 온전히 책에 빠져든 그녀를 방해하는 것들이 소리 없이 지워졌다. 검은 기억도, 붉은 상처도, 누런 일상도.


그러다 포스트잇이 붙여진 페이지에 닿았다.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 형광 포스트잇에 정갈한 글씨로 적힌 문장.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녀는 문장을 천천히 되뇌었다. 어디서 옮겨적은 글일까. 그는 이 문장에 마음을 기대었던 걸까. 바꿀 수 없는 것을 붙잡은 채 스스로를 괴롭히던 그의 마지막 모습과 지금의 자신이 겹쳐졌다. 이미 일어난 일의 조각들을 곱씹으며 현재를 누렇게 변색시킨 어리석음도 함께. 그녀는 그와는 다른 결말을 끌어낼 수 있을까. 간절한 마음으로 주문처럼 문장을 움켜잡았다.


책장을 덮으니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커튼 사이로 새벽의 가장 얇은 빛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내려다보았다. 책 표지를 채운 검은 유광의 글씨가 희미한 빛에 반사되어 여리게 빛나는 듯했다. 마치 그 안에서 살아있는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는 것처럼.


손끝으로 글씨를 쓸어내렸다. 따뜻했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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