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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검은 25화

사암

by 혜윰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하다가 검은 나무젓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사각형으로 길쭉하니 깎은 것이 모서리 없이 둥글둥글하다. 나름 멋을 내어 검게 덧칠한 것이 벗겨져 누런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뭐 하나 쉽게 버리지 못하는 그녀는 젓가락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결국 깨끗이 씻어 수저통에 꽂았다.


그렇게 버리지 못하고 가슴 속에 꼭꼭 끌어안고 있는 기억들은 언제쯤 정리할 수 있을까. 젓가락이야 볼품없어도 그럭저럭 쓴다지만, 쓸모없는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아파하는 스스로를 그녀도 어찌하지 못했다.


한 여행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프하라 카를교 위의 동상이 문득 떠올랐다. 화면은 맑은 푸른 하늘과 그보다 더 짙푸른 블타바강 위를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다리 위에 줄지어 선 조각상들. 어떤 것은 제 빛깔을 간직했지만, 어떤 것은 검게 변해 있었다.


사암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세월이 흐르며 대기 중의 수분이나 먼지, 유기물과 반응해 색이 어두워진 것이라 했다. 풍화와 오염이 빚어낸 시간의 침전. 성당의 외벽도 오래된 성의 첨탑도 마찬가지였다. 복원 작업에 힘쓰기도 하지만, 일부 검은 부분은 역사적 가치와 미적 이유로 남겨둔다고 했다.


역사적 가치와 미적 요소 때문에 검은 상태로 유지하기도 한다……. 그녀가 기억을 끌어안고 있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여전히 진물이 흐르는 상처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풍화의 시간일지도.


그녀는 그릇을 헹구다 무심코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린 밤공기가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었다. 거울처럼 비친 자신의 얼굴 뒤로 어둠이 검게 번졌다. 검은색은 수많은 빛과 시간을 머금고서야 그렇게 짙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검게 변한 조각상들은 닳고 상한 흔적이 아니라 그만큼 버텨온 시간의 자국이었다. 검정은 살아남음의 색이었다. 검은 것들이 품은 시간의 결 속에 그녀도 있었다.


물소리가 그친 부엌은 고요했다. 그녀는 전등을 껐다. 어둠이 따라와 방안을 채웠다. 문이 닫히고 적막이 내려앉은 거실 창문으로 은은한 빛이 가만가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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