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재화란 언제나 부족했다. 규칙적인 가슴께의 오르내림과 반복되는 두 다리의 교차조차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모두 돈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똑같은 교실, 똑같은 일상을 보내느라 빈부격차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 진학 후 돈에 대해서 자주 생각했고 전체 집단에서 나는 어느 계급에 속하는지 곧잘 셈했다. 우리 부모님은 집도, 차도, 직업도 있었지만, 성인 이후 만난 사람들과 나는 한 부류로 묶이기에 어려워 보였다. 지붕이 있어도 다 같은 집이 아니고 바퀴가 네 개 달려있어도 다 같은 차가 아니었다.
02
학과 수업이 모두 마치고 자유시간이 시작되는 오후 6시쯤부터 자리를 떠야 했다. 나와 친구들 모두 학교 근처 음식점으로 갔지만 그들은 식사를 즐기기 위해서였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방학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기들은 이리저리 여행도 가고 추억을 쌓았지만, 나는 통장잔고에 돈을 쌓아야 했다. 정기적으로 또 꾸준히 아르바이트해야 했기에 약속에서 서서히 소외되었고 점차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기억이 생겼다. 공유하지 못한 시간에 대해서 넉살 좋게 물어볼 정도로 초연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다는 생각에 일상에서 그들이 있을 자리를 지워버렸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나만이 진정한 어른이고 그렇지 않은 애들은 온실 속의 화초라고 생각했다.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아서 사회생활이 뭔지도 모르는 아직 어린 대학생. 심지어 아르바이트 중에서도 육체노동만이 진정한 일이라고 여겼다. 프롤레타리아의 마음을 아는 건 나뿐이라면서 나머지 사람들을 얕잡아 봤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를 보듬어 줬다면 이런 마음들이 금세 흩어졌을 텐데. 치열했던 순간들이 안쓰럽지만은 않았을 텐데.
03
대부분의 경우 두 가지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책상에 앉아서 가르치는 일과 음식점이나 마트에서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일. 학과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 책을 가까이하는 것도 곤욕일 때쯤 앉아있을 시간도 없는 아르바이트할 요일이 왔다. 오래 서 있어서 발이 아프고 몸이 지칠 때면 과외를 하는 날이 다가왔다. 그러다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아이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면 차라리 전공 공부를 하고 싶은 상태에 도달했다. 학생 본분에 집중하려다가도 다시금 학교 밖 생활이 그리워져 육체노동 - 과외 - 학업 세 개의 일을 위태롭게 저글링 하며 대학 생활을 보냈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할 정도의 용돈 정도만 벌면 됐지만 학과 공부와 병행하면서 아르바이트하기에는 버거웠다. 힘들다고 느끼면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바쁘게 더 열심히 살았었다. 내 의지대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지만, 눈치 보지 않고 용돈을 받으며 대학 생활을 할 수 없는 집안 상황을 비관하기도 했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었고 그쯤에는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돈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니는 동기들을 보면서 배알이 꼴렸다. 다음날 또 다음날 강의실에서 아르바이트 갈 생각을 하면 마음 한쪽이 답답해졌다.
04
내가 느끼는 우리 집의 가정 형편은 국가 장학금을 받아도 절반은 받아야 했는데 매 학기 산정되는 기준 중위소득은 300% 이상, 9 분위 이상이었다. 지원 구간 표에 따르면 우리 집은 월 천오백 이상의 재산이 있는 집안인데 왜 이렇게나 사정이 빠듯한지 알 수 없었다. 구체적인 자산 규모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 엄마가 살림을 알뜰하게 해서 그렇지 넉넉한 가정은 아니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경제적 독립심을 가르쳐 주기 위해 숨겨놓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소득 분위 산정 방식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런 억울함 때문에 국가 장학금 신청 결과가 나오는 날이며 사방팔방 내가 왜 9 분위냐고 이 정도면 타워 팰리스에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자조적인 소리를 하고 다녔다. 국가장학금을 받는 동기가 있으면 부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금액이 얼만지 물어봤다. 당사자도 숨김없이 공개하고 오히려 공돈이 생겼다며 자랑하는 분위기였다. 눈앞의 이득이 그저 부러웠고 친구들이 밝게 웃으니, 상황이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05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한 달 생활비를 쓰고 나면 남는 게 없었고 남더라도 학자금 대출 이자를 갚아야 했다. 물론 아끼면 됐지만 친구들과의 약속도 포기할 수 없었고 남들이 하는 건 모든 해보고 싶었던 나이였기 때문에 저축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와는 다르게 월급을 착실히 모으는 동기들을 보면서 자책했던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따로 용돈을 받고 아르바이트로 인한 소득은 여유자금이었다. 동일한 시간을 할애해서 비슷한 돈을 벌더라도 손에 얻어지는 결과는 각기 달랐다. 그 시절에 나는 출발점과 도착지까지 거리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06
가지지 못한 것에 갈증을 느끼고 분노로 타오르는 시간은 더디게도 빠르게도 흘러 이제 나는 아르바이트할 필요가 없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런데도 회사에서 매일매일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 월급 받는 자의 막중한 책임감에 몸서리가 쳐지면 아르바이트가 하고 싶어 진다. 그저 일회성의 친절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벼운 관계들이, 본업은 학생이라서 미숙해도 된다는 믿을 구석이 그리워진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이전보다 나아졌는데 가끔 떠오르는 지난날을 좋은 경험이었다고 웃으면서 말할 수가 없다. 아직 나의 시간은 그때에 머물러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