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구경, 그 여정의 서막

지도책과 전화번호부

by 은섬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책들이 있었다. 바로 지도와 전화번호부다. 인터넷,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이 두 가지 책이 필수였는데 서점에는 지도 코너가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하며 마련되어 있었고, 수많은 지도들이 교통지도, 도로지도, 관광지도, 정밀지도, 수도권지도 등 각종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전화번호부 또한 인명별 상호별, 업종별로 발행되어 배부한다는 공고가 뜨면 동네 전화국으로 받으러 갔었다. 알록달록 화려한 표지를 두른 전화번호부는 한 뼘만큼 두꺼워서 바닥에서 라면 먹을 때 냄비받침으로도 쓰고, 베개 목침 대용으로도 쓰고, 사용처가 다양했다. 지금은 공중전화부스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휴대폰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골목마다 수많은 공중전화 부스가 줄 서있고, 그 부스마다 전화번호부 책이 금속체인에 매달려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모습들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볼 수가 없으니 꽤나 오래전 일 같이 느껴진다.


어릴 적 늘 집에서 책만 읽다 보니 집에 있는 책들은 벌써 몇 번씩 읽은 터라 가끔 다른 책들을 구경하러 큰 서점에 갔었다. 어린 걸음으로 한 시간쯤 걸어 수많은 책들이 가득 찬 서점에 도착하면 언제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우연히 들춰 본 지도책 한 권이 내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내가 알고 있는 지도는 교과서 사회과부도가 전부였는데 서점에서 만난 지도책은 정말 자세했다. 제목부터가 정밀지도다. 도로며 건널목 표시, 지하철역, 건물의 이름과 모양, 아파트 동 번호까지 알 수 있었다. 신세계를 만난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지도를 사서 품에 안고 집에 온 날 이후 나는 날마다 지도를 한 장 한 장 펼쳐보며 세상 구경을 했다. 나를 데리고 밖에 나갈 어른이 없었기에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쯤 날을 잡아 지도에서 본 곳을 직접 가보았다. 서울은 곳곳이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었고 지하철에서 내려서는 걸어서 가고자 하는 곳을 찾아갔다.


크고 작은 각종 박물관, 미술관, 고궁, 공원, 유적이라 이름 붙은 곳을 지도에서 찾으면 전화번호부에서 번호를 찾아 운영시간과 입장료 등을 유선으로 물어보았다. 초등학교 때 이미 키가 160 이 넘었고 워낙 노안이어서 어린아이 혼자 왔다고 입장을 거부당했던 적은 없었다. (초등학생인 나를 고등학생 이상 대학생으로까지 보았다. 또 그 당시 좀 의심스러웠다 하더라도 어린아이가 혼자 돌아다닐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가는 길을 잘 찾을 수 있을지 두근두근 길을 나서면 진짜 지도에서 본 것과 똑같은 길과 건물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도책은 너무 무거워서 들고 다니지 못하고 내 나름대로 목에 거는 작은 수첩에 그림을 그리거나 메모를 하고 다녔는데 '지하철 3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 네 번째 건물에서 좌회전, 큰 도로 두 번째 건널목에서 맞은편, 00 빌딩까지 직진' 뭐 이런 식의 메모였다. 몇 날 며칠 지도를 외울 정도로 들여다보고 루트를 확인한 다음, 도착하고자 하는 곳을 딱 찾았을 때는 그게 뭐라고 어린 마음에 희열 같은 것도 느꼈다.(이러한 길 찾기는 내겐 너무나 익숙한 방법이어서 2020년도까지 2G 폰을 쓰고 있던 나는 출국 전 구글 스트리트뷰로 길을 확인하고 주변에 랜드마크가 될 만한 나름의 기준점을 만들어 이정표를 세우고 곳곳을 다녔다. 와이파이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는 여행은 생각보다 제법 자유롭다. 21년도에 반 강제로 스마트한 세상을 만났지만 아직 스마트폰 활용법을 다 모른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매우 할망답다. 주변과 담쌓고 살았던 할망스러운 40대임을 인정한다.)


길 찾기에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4학년? 5학년? 내 생에 첫 콘서트 관람이다. 그때는 각종 전시회나 공연 등을 신문지면을 통해 광고를 했다. 정동 MBC 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이정석 콘서트를 신문 하단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지하철에서 내려 근처까지는 온 것 같은데 건물들이 빽빽하고 작은 골목들이 너무 많아서 어디가 어딘지 찾을 수가 없다. 혼자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남들에게 길을 물어볼 용기는 없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정동 문화회관이 라디오 공개홀이란 생각이 퍼뜩 들어 육교 위로 올라갔다. 라디오 방송국이니 큰 안테나가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정말 커다란 안테나가 달린 건물이 보였다. 내 생에 첫 콘서트는 너무 멋졌다. 내 키보다 더 높이 층층이 쌓아 올린 커다란 스피커에서 나오는 심장 쿵쿵 울리는 음악을 처음 들은 터였다.


이미지 pixabay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시절까지는 이런 식으로 세상 구경을 다녔고 고교시절에는 일요일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 조금 더 먼 곳을 다녔다. 새로운 곳에서 무엇을 보거나 경험하는 것도 좋았지만 혼자 몇 시간이고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것 자체가 그저 좋았다. 그리고 고3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 운 좋게도 필리핀을 다녀온 후 세계 곳곳 유랑이 시작됐다. 어린 시절 서점에서 우연히 들춰 본 지도책 하나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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