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주전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었는데 독서 모임 하나로 서로에게 힘이 되는 모습에서 영주는 독서 모임 사람들이 너무나 좋았다.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매달 책을 통해 함께 발전해 나가는 모습에서 자신감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6월 첫 독서 모임은 푸른빛 쨍한 바다가 보이는 바닷가 근처 카페로 정했다. 평일 오전이라 카페는 한산했다.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이 흐르고 큰 원목 테이블이 띄엄띄엄 널찍이 사이를 두고 있는 게 이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동네에 이런 좋은 카페가 있었다니. 글쓰기에 너무 좋은 곳인데. 다음에는 혼자 글 쓰러 와야겠다.'
예전 같았으면 영주는 시끌벅적한 스타벅스나 핫한 커피숍을 가는 걸 즐겨했을 텐데 요즘엔 한적하지만 고유의 멋스러운 동네 작은 카페가 더 좋았다. 모임 회원들이 다 모이자 영주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이번 주 우리가 읽은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책 어떠셨어요? 전 주인공 영주의 삶에 너무나 공감이 되었어요. 늘 남보다 앞서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돌볼 여유 없이 끊임없이 앞을 향해 달려가며 매일 불안하게 살다가 결국 마음에 병이 생겨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죠.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주변 사람들의 날이 선 안타까운 시선을 받는 그 모습이 저와 너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연 씨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영주 씨도 그런 적 있어? 주인공이랑 이름이 같아서 그런가. 하하하. 난 대학 졸업해서 줄곧 공무원 생활에 일도 어느 정도 만족하는 편이라 영주의 고뇌가 크게 와닿지는 않더라고. 하지만 이 책에서도 그렇고 결국 삶에서 남들의 생각과 시선 따위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나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 가장 최고지."
"그게 중요한 거죠. 제 스스로 만족하는 하루하루가 쌓이면 못해낼 게 없다고 봐요. 저는 겉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살았어요. 제 자신의 마음을 돌보기보다는 남들이 좋게 봐주면 이런 것쯤은 참아야지, 이건 어릴 때나 하는 생떼야 하면서 복에 겨웠다고 생각하고 제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희수 씨가 입을 열었다.
"남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내 소신껏 살기란 쉽지는 않죠. 저도 남편과 함께 키즈카페를 했다가 잘 안 돼서 접고 남편은 배달일을 하고 저는 육아를 했을 때 정말 남들이 모르는 쥐구멍으로 들어가 살고 싶었어요. 빚도 빚이지만 주변 친구들이 남편과 저를 보는 안타까운 시선과 말들에 매일이 너무나 힘들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남편과 저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었고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 지금도 틈틈이 내면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독서 모임도 그 노력 중 하나이고요."
희정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주부나 육아맘이라고 하면 직업도 없고 돈도 못 벌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사람처럼 낮게 보는 시선이 간혹 있어요. 그럴수록 스스로 자신의 모습에 더 당당해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봐요."
"희수 씨와 희정 씨 말에 저도 너무나 공감해요. 전 지금의 제 모습이 불과 몇 달 전과는 너무 많이 달라졌음을 느껴요. 이 모임에 나오기 전에는 후회와 남 탓으로 가득한 동굴에서 어떻게든 탈출하고자 홀로 외로움, 슬픔, 좌절을 다 맞으면서 극복해 나갔다면 지금은 독서 모임 회원들의 긍정 에너지로 용기 있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영주의 말에 독서 모임 회원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렴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단 셋이 낫죠. 전 이 모임으로 지식도 많이 쌓이고 시야도 넓어졌어요. 조금 여유로워졌다고 할까요. 매일 책을 읽어야 하고 2주에 한 번씩 모임 시간을 따로 빼야 하는데도 더 여유로워졌어요. 일상의 재미도 생겼고요. 그런데 전 영주 씨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활발한 사람이라고 처음엔 생각조차 못했어."
분위기 메이커인 이연 씨의 말에 모두들 크게 웃었다. 이연 씨는 독서 모임 외에도 축구 동호회도 함께 하고 있을 만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연 씨 옆에 있으면 덩달아 쾌활해지는 느낌이었다.
"저도 요즘 저한테 한때 이런 적극적인 모습이 있었지 하고 깨달아요. 중학생 때 미술시간에 사과로 정물 수채화를 그렸는데 빛과 그림자에 따라 사과의 채색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싶어서 며칠을 밤늦게까지 오랫동안 붙잡고 완성했던 게 아직도 생각이 나요. 엄마가 제발 자라고 불 끄겠다고 할 만큼 늦게까지 잠을 줄여가며 멋지게 해내고 싶었죠. 생각해 보면 제 스스로 무언가를 이렇게 몰두하며 했던 적은 어른이 되어서 보다는 어릴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전 어른이 되면서 적극성이 점점 사라졌거든요. 그저 할 일을 주어지면 주는 대로, 딱 그 선에서만 일하는 사람으로 변해갔죠."
"뭐가 영주 씨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수영 씨가 물었다.
"음.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늘 생각해 왔어요. 내가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졌지, 자존감이 왜 이렇게 낮아졌지 하고요. 그때 알았어요. 전 남과 비교하고 남의 시선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나쁜 버릇이 꽤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거죠. 남의 눈치를 보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을 그저 쫓아가려고 한 거예요. 이렇게 생각이 많아질 때면 늘 남편과 대화를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제가 그렇게 중요시하며 살아왔던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사람들은 생각조차 안 할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죠."
"전 저희 남편이랑 아이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서로에 대해서 깊이 얘기한 적이 있었나 싶네요. 남편보다 이 모임에서 더 속 깊은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하하하."
이연 씨가 또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만큼 이 모임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뜻인 거죠."
수영 씨의 말에 모두가 확신의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는 독서 모임을 한 날이면 밤에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로 나와 독서 모임 후기를 기록했다. 모임에서 인상 깊었던 이야기, 느낀 점, 이달의 책에 대한 후기까지 쓰다 보면 그때의 분위기를 다시금 느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 1시가 넘어서 자는 경우도 많았다. 신기하게도 그다음 날은 피곤하기는커녕 충만한 에너지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다. 영주는 이 느낌을 독서 모임 회원들과 함께 하고자 후기 노트를 공유했다.
"영주 씨, 작가 돼도 되겠어요. 글솜씨가 너무 좋은데."
"오늘도 공유해 주는 거예요? 영주 씨 글 계속 읽고 싶어요."
독서 모임이 끝날 때면 어느새 회원들은 영주의 후기 노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가 함께 만든 거예요. 전 그냥 기록만 했을 뿐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