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열대야에 지치고 에어컨 바람도 버거워질 때 침대에 누워 있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며 "어차피 잠 안 오는 밤, 별 보러 갈래?" 한마디에 곧장 천문대로 향했다.
예약 없이 방문한 탓에 천문대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깜깜한 산등성이에서 바라보는 풍경 만으로도 시원하고 평화로웠다. 그렇게 둘만의 세상에서 자유로웠고 행복했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것, 그해 여름 시부모님 두 분이 한 달 차이로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님의 떨리는 전화 목소리 "아버지가 화장실 앞에서 쓰러졌는데, 어쩌지... 어쩌지..." 놀란 어머님을 진정시키고 119에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고 시댁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구급차는 도착해 있었고 구급대원들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병원으로 후송 중이셨고, 우리는 뒤따랐다.
일찍 돌아가신 친정 아빠를 대신해 사랑을 주신 아버지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에게도 두려운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떨고 있는 순간에도 아버지는 강했고, 본인의 삶을 지켜내려 사투를 벌이셨다.
장담할 수 없는 수술도 무사히 마치셨고 , 힘든 중환자실 생활도 이겨내셨다.
고통의 순간은 여기서 끝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줄 았았던 우리 가족에게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사람이 어디까지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버지 퇴원 한 달 후 퇴원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어머님이 대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아버님의 병환과 어머님의 병환은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천지 차이였다. 대장암 수술과 12번의 항암치료, 그 지난한 과정은 아이 없이 가뿐히 움직일 수 있는 우리 부부 몫이었다.
남편은 두 분을 병원에 모시고 다니느라 그해 휴가, 연차를 다쓰고도 모자랐고,아버님 끼니와 항암치료로 지친 어머님을돌보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생각할 겨를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일어난 일들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자'라고 마음먹었다. 우리의 후회하지 않는 선택은 부모님을 돌보는 일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두 분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행히 부모님도잘 이겨내고 계셨다. 그러나 난 다른 곳에서 또 인생의 쓴맛을 봐야 했다.
부모님을 돌보느라 동동 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동서가 임신을 했다.
이미 두 아이가 있던 동서가 생각지도 않게 쌍둥이를 임신했단다. 이 사실은 한동안 나에게 비밀이었고,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남편에게 괜한 트집으로 화를 냈다. 그동안 비밀로 한 가족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바로 얘기하지 못한 동서의 마음도 알지만, 그때 나는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어떤 맥락도 없이 그냥 화가 났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나의 분노가 치밀었다. 아이 없는 삶을 선택했던 것도 나였고, 부모님을 돌보기로 한 것도 나였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모든 시간들이 억울하고 화를 내다니 스스로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며칠 후 온몸의 힘을 끌어 모아 동서에게 축하 인사와 축하금을 보냈다.마땅히 축하받을 일에 동서는 또 얼마나 내 눈치를 봤겠는가, 한편으로 동서가 안쓰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또 내 마음의 폭풍은 잦아들었다. 귀여운 두 녀석이 무사히 세상으로 나오고 돌이 되었다. 그 무렵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부모님은 좋아져 생활의 불편함도 없게 되었다.
돌잔치를 치르고 우리는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딱히 말은 없었으나 남편은 그동안 고마움의 마음으로 나를 위한 시간을 주고 싶었던 거 같다. 남편의 진심에 부모님의 마음까지 보태져 떠난 여행은 평화로웠고 그 모든 것에 대한 보상 같았다. 인생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몰아친듯한 시간, 그래도 옆에 있는 사람으로 인해 견딜 수 있었고, 그 또한 우리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제주도 여행에서 남편이 얘기했다,
"여기서 더 이상 나쁜 일이 있겠니? 인생의 고통 총량이 있다면, 우리는 이제 다 치른 거야, 이제 좋은 일만 남았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