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큰 애는
빚에 시달리며 세월을 보내고 나면
인상이 고약한 아줌마가 될 거라고 믿었다.
자신의 미를 깡그리 잊은 듯했다.
이슬아, <끝내주는 인생 p.36>
가수 싸이의 공연이 성황리였다는
뉴스가 티브이에서 흘러나온 날이었다.
화면에 잡힌 관객들은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하나같이 흠뻑 젖어 있었고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투명한지
세상의 모든 설움이 스치지도 않은
이들의 표정 같았다.
이상한 건 화면을 보는 내 얼굴뿐이었다.
나는 파아랗게 웃는 그들을 보며
엉엉, 아니 펑펑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너무 기괴해서
누가 보면 안 될 텐데 걱정될 정도였지만
쉽게 그쳐질 울음이 아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좋아하는 탕수육을 먹고
배를 두드린 기분 좋은 날인데도 말이다.
대체 이 울음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다가
출신을 물어봐야 무얼 하겠나.
나도 모를 어디 저 깊숙한 곳의 것이겠거니,
나올 만해서 나오는 거겠거니 하며
나는 그날 아주 자리를 펴고 울었다.
어떤 긴 터널의 아픔을
지나고 난 사람에게 드는 감정은
‘안도’일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아픔으로 인해
변한 나를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펑펑 울고 나서 쌍꺼풀이
각 눈에 두 개, 세 개가 짖어진 눈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도 해맑게 웃을 수 있을까? “
부정적인 감정들에도 소중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감정들이 주는
귀한 메시지를 읽는 데에 그리 능숙하지 않다는 것.
이근철, <교양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