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히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김 훈, <자전거 여행>
김훈 선생님의 ‘자전거 여행’은
내 나름의 전장 한가운데서 만난 문장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오르막이 버거웠던 당시를
이 문장 덕분에 견뎠다.
어린 시절 탔던 눈썰매를 생각했다.
조금 올라가서 조금 내려오면
그 재미있는 하강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워서
높이 올라가 내려오던 추억을 떠올렸다.
이렇게 높이 올라가면 하강할 때 그 좋은 기분도 더하겠지,
이 정도 올라왔으면
내려갈 때의 뿌듯함은 아주 대단할 거라며 위안 삼았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김 훈, <바다의 기별>
이어서 읽었던 <바다의 기별> 속 이 문장은 더한 위로였다.
위기의 나날 속에서 손에 잡히는 것들을
일단 붙잡고 보는 본능이 발동하던 찰나였기에
이 문장도 그냥 붙잡고 믿었더랬다.
지금에 와서 지나온 길을 돌아 보니
당시의 힘든 일은 오래된 영수증 속 날아간 글씨처럼 흐릿해 졌다.
선생의 문장은 맞았다. 역
시 선생님 말씀은 잘 들어야 한다.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에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고
형태와 색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면,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과 좌절이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
내 절망과 좌절은 과거에 있거나,
두려움과 공포는 미래에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감각적 세계뿐이라는 것.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는 또 하나의 문장.
힘든 시기가 더 힘들어지는 이유는
비단 당시에 내게 닥친 문제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삶이 이렇게 실패로 결론지어질 것 같은,
내가 평소 의식하고 사는 주변의 아무개보다
못한 인생이 된 것만 같은 생각 때문에
우리 마음은 더 무너진다.
뻔한 얘기지만 누구와 경쟁하며 살 필요가 없다.
우리 생의 끝 날,
우리 인생을 점수로 매겨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릴 것이 아니니까.
각자의 마지막 날이 달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으며,
정량적 평가가 불가능한
저마다의 시간을 어느 누가 스코어로 도출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삶 전체에서는 그 누구도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다.
김연수 작가의 문장은 그래서 의식적으로 되새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자꾸만 잊어버리고
스스로 짐을 지기를 자처하는 어리석은 나를 깨우려고 말이다.
그렇다.
내 절망과 좌절은 과거에, 두려움과 공포는 미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