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랏투에 사는 폴 Nov 25. 2024

가구점 사장의 책상 이야기



그게 소설이든 시든,
어떤 젊은이가 갑자기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면,
지금 그의 내면에서 불길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작가란 무엇인가 1>




많은 시간 내 영역은 책상이었다. 

세 자매로도 충분히 떠들썩한 우리 집은 

늘 손님이 드나들어 사람 내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가족 중 유일하게 내성적이었던 탓에 

늘 의자에 엉덩이가 붙어 

떨어지지 않는 척하며 혼자 있기를 자처했다. 


책상 위, 

지극히 나만의 것인 내 노트에 

내가 읽는 책의 이야기와 유치하기 그지없는 

그 시절 나의 이야기들을 적으면서 말이다. 

그것이 내게 인 내면의 불길이었을까. 


이야기를 읽고 써 내려갈 수 있는 책상은 

내 마음의 빗장이 걷어지는 곳이었다. 

친구에게 서운한 날 몰래 엎드려 울고, 

부모님께 혼난 날 숙제하는 척하며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마음을 끄적이던 곳. 

일기장과 비밀 편지를 숨겨둔 내 책상. 

내 배에서 나의 깃털을 뽑아 스스로를 감쌌던 곳이다.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마음 둘 곳을 찾을 때 

책상 앞으로 가 의자를 당겨 앉기만 해도 

위안을 주는 공간이 

금세 마련되는 책상은 환상의 가구였다. 


책상을 밟고 꼭대기에 있는 책을 

꺼내려다 책상 유리가 깨진 날이 있었다. 


유리가 걷혀 발가벗겨진 

책상에 앉았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앉기 전까지 나는 그저 

책상과 유리 사이에 끼워 두고 보던 사진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유리를 새로 맞춰 줄 테니 

며칠만 기다리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늘 취하던 자세 그대로 책상에 앉아 손을 올렸다. 


전혀 다른 촉감이었다. 내 책상이 이렇게 아늑했구나. 


유리가 걷혀 속살을 드러낸

 나의 나무 책상은 정말 부드럽고 따뜻했다. 

팔을 올려도 차지 않았다. 

맨살이 밀려도 찌-익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우개 가루까지 잘 쓸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나는 책상과 더 한 몸이 되어버렸다.  


공부를 특별히 잘하진 않았다. 

그냥 온종일 그 위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소파나 침대에서 보낼 웬만한 휴식시간도 

나는 모두 책상에서 보냈고 아직도 그렇다. 

세상의 모든 책상이라 불리는 사물을 

애정한다고 확신할 수 있지만, 

나는 내게 꼭 맞는 운명의 책상을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꼭 맞는 높이와 너비였으면 한다. 차

갑지 않은 소재, 따뜻한 촉감이었으면 한다. 

책상에 기대 무엇을 읽고 써도 

흔들림이 없도록 무게감이 있으면 좋겠다. 

너무 세련된 디자인이 아니라 

투박한 듯 조금은 촌스러웠으면 한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잘 만들어진 책상이길 바란다. 


하지만 운명의 책상은 

내가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못 만날 확률이 더 높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내 사는 여정이 

저 운명의 책상을 즐겁게 찾는 시간들이면 좋겠다. 

아주 화려한 것을 좇아 

옆을 보지 않고 달리지 않았으면 한다. 

삼십 년이 넘는 동안 내가 좋아해 

온 책상 위에서의 시간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그 즐거움으로, 

그 시간에서 받는 힘으로 계속해 살아간다면 

해가 갈수록 흐릿해지는 ‘어릴 적 나’를 

그나마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어떤 새는 둥지를 만들 때 자기 배에서 깃털을 뽑아 쓴다고 했다. 사실 책상에서 하는 일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내 배에서 깃털을 뽑아 둥지 틀기. 내가 나를 재우고, 나를 먹이는 일. 일기를 쓸 때면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다.

문보영, <일기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