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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랏투에 사는 폴 Nov 25. 2024

첫 장을 펼치며

| 프롤로그



어제 주머니칼을 잃어버렸는데,
그 일로 나의 철학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의 기반이 얼마나 약한지 깨달았다.
그런 사소한 분실에 무척이나 우울해졌고,
오늘도 감상에 젖어 있는
나 자신을 놀리며 웃어 넘기 질 못하고
 여전히 온통 잃어버린 칼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


헤세의 책이 시작이었습니다. 

헤세가 아끼던 정원용 칼을 잃고 쓴 글이지요. 

대문호의 웃음기 없는 투덜거림이 귀여웠습니다. 

한 꼭지의 글 안에는 

아끼던 칼의 세세한 생김새며 

처음 만난 날의 기억들을 

첫사랑처럼 아리게도 그리고 있었습니다. 


크게만 보이는 헤세도 칼 하나에 울고 웃다니.

헤세는 행복한 사람이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칼 하나에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의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웠을까요.  


저는 이런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내가 보고 들은 문장으로 

나만이 겪은 일을 떠올리는 과정은 

지극히 개인의 것이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다 생각합니다. 


저마다 다른 생의 고락을 겪으며 

각자가 위안과 즐거움을 얻는 방법 또한 

모두들 다르겠지만 제 일상의 응원가는 

책상에 홀로 앉아 보고 듣는 문장이고 

그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사회에서 내미는 명함은 

가구 회사 대표의 것뿐이지만, 

스스로가 감각하는 본인은 

가구 컬렉터인 동시에 문장 수집가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가구는 모으는 대로 

예쁘게 전시하고 관리하는 것에 반해 

문장은 그저 제 공책 속 

꾸불텅한 글씨로서만 보관하고 있었네요. 

이제는 가구만큼 정성스레 수집해 온 문장을

제가 받은 위안과 즐거움을 

반듯한 책 속에 붙잡아 두려 합니다. 


헤세가 아끼던 전지가위를 잃어버리고 쓴 

수십 년 전의 글을 잃고 

저는 단 한 번 보지 못한 그 가위를 

덩달아 몇 년째 사랑하고 있습니다. 


헤세처럼 한 꼭지의 글만으로 

제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게 만들 

글 재간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만난 좋은 문장이 

독자들의 마음에도 가닿아 

바쁜 일상에 덮어두고 지내던 

각자의 이야기들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주변의 사랑하는 대상들을 

감각해 보기를 조심스럽게 권합니다. 

졸필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글을 시작합니다. 

어설픈 이의 순수한 사랑가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있다 맛있다 하며 먹으면 더 맛있지요. 

그러니 우리 애정하는 것은 

더 애정하며 기쁜 마음으로 살기를 약속합시다.  




삶은 가차 없고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입힐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 마지막에 좋은 이야기를 남기고,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 머물다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애란, <이 중 하나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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