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보내는 서른일곱 번째 편지

As always

by 한결



중요한 건, 그 파도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잊지 않는 거 아닐까.





To.


나에게는 호주에서 만난 레이라는 친구가 있어.

스시 가게에서 함께 일하다가 자연스레 친해졌는데 첫인상이 제일 인상 깊었지.

맨발로 거리를 걷고 자기 키보다 큰 서핑 보드를 들고 다니며 만나는 외국인마다 인사를 건네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런 그의 삶에 대한 태도가 부러워서였을까.

퇴근 후면 바다를 마주 보고 앉아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서로에게 묻곤 했다.

그 추억들은 내게 아주 특별했어.




시간이 지나 내가 먼저 귀국했고, 얼마 뒤 비자 문제로 레이도 한국에 들어오게 됐어.

레이는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했지만, 오랜 해외 생활에 스펙 하나 없는 레이에게 이 도시는 꽤나 낯설고 냉정했다.


어느 날 레이는 지친 목소리로

“그냥, 바다 좀 보고 올래?” 물었고

우린 무작정 양양으로 향했어.


사실 처음엔 양양이라는 곳이 꺼려지더라. 처음 가보는 곳이기도 했고, sns에는 ‘헌팅의 성지’, ‘유흥의 끝’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거든.

하지만 레이는 자신이 호주를 택했던 이유 중 일부가 그곳에 있다며 나를 설득했고 결국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났어.




구릿빛 피부에 강한 인상을 가진, 서퍼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경보 형과 태환 형.

호주 억양이 묻어 있는 영어와 웃통을 벗은 모습은 처음엔 조금 낯설었지만 이내 양양 특유의 바이브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어.


모두가 잠든 밤에 평상에 둘러앉아 각자의 삶을 꺼내놓던 새벽.

우린 각각의 깊이대로 철학을 말하며 결국 삶의 목적은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데에 닿았다.

누군가는 순간의 낭만에 젖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

그 표면적인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문득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서퍼들 말에 따르면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파도의 높이가 따로 있다고 해.

그래서 서핑은 큰 파도를 타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맞는 파도를 기다리는 거라고 하더라.


우리 삶도 서핑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각자 다른 크기의 파도를 만나고, 각기 다른 속도로 그 위를 지나가니까.

어떤 날은 감당하기 벅차고, 어떤 날은 물에 휩쓸려 한껏 고꾸라지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내게 딱 맞는 파도 덕분에 부드럽게 나아가기도 하지.


중요한 건, 그 파도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잊지 않는 거 아닐까.




양양에서의 하루는

내가 지나온 파도를 되돌아보게 만든, 거칠지만 따뜻한 쉼표 같았어.


너의 파도는 어떤지 문득 궁금해진다.

또 편지할게.




From. 태닝을 하며

한결:)




p.s 경보형 가게에서 만난 강아띠..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