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쓰임
나나는 아이를 안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된 가구로 가득한 내부.
낡아 보이긴 했지만 허름하지는 않았다.
그때, 나지막한 벨소리가 가게 안에 울렸다.
나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버튼을 눌렀다.
품 안의 아이는 눈을 감고 있다.
벽에 걸린 모니터에 한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는 적당한 살집 덕분에 푸근한 인상이었다.
생김새는 동양인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나나!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
나 어제부터 계속 연락했어."
그의 한국말은 서툴지만 거침없었다.
"라드니. 그새 한국말 많이 늘었네요?"
"말 돌리지 마, 나나. 아니 근데."
화면 너머 라드니의 시선이 나나 쪽으로 기울었다.
"나나, 애기 있어?"
그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나나는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쉿-"
아이는 그 사이 잠든 모양이다.
나나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이를 가게 한쪽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아이의 얼굴이 발그레하다.
차가웠던 몸이 조금은 풀린 걸까.
"무슨 일이에요, 라드니?“
"나나, 혹시 설마 데이터 보는 거야? 우리 몰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그걸 왜 보겠어."
모니터 너머의 남자는 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듯한 제법 긴 숨이었다.
"좋아. 나는 나나 일단 믿어. 나 곧 회의 있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 나나."
화면이 꺼지고 그가 사라졌다.
나나는 소파 쪽으로 돌아와 잠든 아이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때였다.
가게 문이 힘 있게 열렸다.
짙은 갈색 모피코트를 걸친 여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전체적으로 윤기 없는 코트였지만 그녀의 얼굴빛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어휴, 자기야. 요즘 왜 이렇게 추워?"
코트 깃을 여미는 여자의 손에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장갑이 씌워져 있었다.
나나는 가벼운 인사 후
난로 위에서 적당히 데워지고 있는 티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아냐 아냐, 나 시원한 걸로 줘."
나나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건네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들이켰다.
"하아—."
그녀의 짧은 숨.
그녀는 테이블, 그 위에 놓인 컵, 그 컵을 감싸고 있는 자신의 양손만 말없이 내려다봤다.
"우리 아들. 며칠 안 남았대.
근데 마침 자기한테 연락이 온 거야.
이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나는."
윤기 없는 그녀의 얼굴에 잠시나마 어떤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스쳤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자기, 나 열여덟에 진우 낳은 거 알지.
이십 년 키우면서 참 많이 행복했는데.
과분할 정도로 말이야.
그러다 그날… 그날 사고 나고, 지금까지 십구 년이야. 십구 년."
"이거…"
나나는 그녀를 섣불리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들이 이런 위로의 말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나는 그녀의 말 끝을 기다린 후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은 고요했다.
"이게… 그거야?"
여자의 눈에 봉투 겉면에 적힌 글자가 들어왔다.
수년에 걸쳐 상상해 온 순간.
2019, 서울대 입학식, 정품
"사모님, 깨끗한 물건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리고 아실지 모르겠는데 요즘은 이런 물건이 거의 없어요.
그래도 이건 가치가 폭락하기 전에 어떻게 거래가 이뤄진 거더라고요. 겨우 구한 거예요."
여자는 나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봉투 끝부분을 어루만졌다.
"알아. 그래도 우리 애한테는 의미가 있을 거야.
여기 가다가 그렇게 됐는데..
자기야, 난 매일 아니 매 순간 아니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순간에도 내내 생각해.
만약 우리 애가 5분만 늦게 나갔더라면…
그랬더라도 그날 그렇게 되었을까...
어쨌든 이게 있으면 우리 진우가 좀 더 편하게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말끝이 완전히 흐려졌다.
눈물이 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어떠한 소리도 없었다.
나나는 그 모습을 지켜만 봤다.
이 가게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이 바로 이런 때다.
잠시 후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이거 가지고 가면 되지?"
나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여자는 봉투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그동안 고마웠어 나나. 여러모로 말이야."
그녀는 가지런한 외투를 재차 여몄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나나가 입을 열였다.
“사모님.”
“17분짜리예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나눠 쓸 수 없어요. 주입 중에 멈출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오직 한 명만이에요. 아셨죠?.”
여자는 잠자코 들었다.
나나의 말이 끝난 후
그녀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가게를 나섰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사라져 가는 그녀.
나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가져간 기억은 누구를 위해 쓰이게 될까.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
아니면 남겨질 사람?
결국 더 간절한 쪽이 가지게 되겠지.
어느 쪽이든 누구 하나 구한다면
그걸로 된 거다.
더 이상 관여하지 말자.
쾅, 쾅, 쾅.
거칠지만 일정한 소리.
“경찰입니다!”
경찰? 나나는 본능처럼 소파를 바라봤다.
아이는 미동조차 없다.
하지만 나나의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