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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생 Feb 08. 2022

제주 사람들(그들의 문화)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여행은 느려진다.

 난 제주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

이제 고작 10년 산 것으로 이곳 사람들을 이야기하것이 사실 쉽지 않으며 많조심스럽기도 하다.


 그저 나의 시선에서 본 느낌을 담아 여행자들에게 그들의  속 느린 여행을 추천하고자 하는 것이니, 적당한 선에서 이해해주길 바라며 글을 시작해본다.

   

 제주의 척박한 땅과 거친 파도,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용천수)은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았고 공동체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화산 폭발로 인해 제주의 땅은 돌밭이었고 그들은 돌을 하나하나 함께 치우며 지금의 농경지를 이루었고, 그 밭에서 나온 돌들로 밭담과 집을 세웠다.    

 화산이 폭발할 때 제주의 남쪽으로 더 많은 양의 용암이 흘렀는지 남쪽의 땅들은 유독 더 돌이 많아 밭작물보다 따뜻한 날씨와 돌이 많은 토질을 고려해 감귤농사를 택했나 보다.    




 그리고 아가는꼭 필요한 물을 위해 용천수(한라산에 내린 비와 눈이 땅으로 스며들어 대수층을 따라 흐르다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지표로 솟아나는 물)를 중심으로 마을들이 발달했다.

용천수를 중심으로 발달된 법환마을

 자료에 의하면 1999년 조사 당시 제주의 용천수는 911개였다고 하며, 솟아나는 물의 양에 따라 그 마을의 인구수를 결정하는 근간이었다고 한다.

지금 제주 사람들은 용천수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해녀의 집

 그리고 제주 해녀들은 지속 가능한 수입창출을 위해 마을마다 공동어장을 꾸려 어촌계를 유지하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런 제주의 공동체 문화를 우리는 흔히 “괸당 문화”라고 한다.

‘괸당’은 ‘권당’에서 비롯된 말로 친인척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이다.

   

 마을마다 성씨가 같은 씨족 마을도 있지만 씨족 마을이 아니라 해도 험난한 자연에 맞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두 함께 힘을 모으지 않으면 안 돼 이런 문화가 생겼나 보다.    




 그래서인지 내가 처음 이곳으로 왔던 당시 외지인에게 다소 냉소적이고 배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의 한 수였을까?

아내는 당시 살던 동네 작은 마을에조그만 슈퍼를 하게 됐고, 그 슈퍼는 마을의 소식을 앉은자리에서 알게 해주는 소식통 같은 곳이자 이곳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가는 계기 련해 주었다.


 어느 날 한 어르신이 가게에 들러 한라산 소주 6병이 들어 있는 선물세트를 사러 다.

조금 있으니 다른 분이 같은 걸 또 찾으다.  

소주 6병 들어 있는 세트를 가지고 어디를 가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00네 사”라고 한다.    

한라산 6병 선물 세트- 지금은 흔히 볼 수 없는 손잡이가 달린 선물 세트로 이곳 에만 있던 상품이다.


 ‘소주 6병을 들고 왜 남의 집 사에 갈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험난한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 대한 아픔과 슬픔을 이곳 사람들은 함께 나누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집 숟가락이 몇 개 인지까지 알며 살아가는 공동체 문화에서 오는 것일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누군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결혼식 문화도 좀 생소했다.

제주는 결혼잔치를 두 번에 걸쳐한다.

결혼 당일 식장에는 친인척과 친한 지인들만 참석하고 나머지는 따로 결혼식 전에 마을회관이나 적당한 식당을 빌려 하루 종일 잔치를 열고 신랑 신부가 한복을 차려입고서는 손님들에게 다니며 인사를 한다.    


 결혼식장에서 혼례를 보고 바로 이어서 피로연장에서 식사를 하며 신랑 신부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던 육지의 결혼 문화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는 색다른 모습이었다.    


 답례품도 요즘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슈퍼타이(세탁세제)를 받아 왔었다.

“왜일까” 궁금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생활 속 문화였다.    


 그리고 장례식에는 “일포”라는 문화가 있다.

어느 날 제주의 지인에게 부고 문자를 받았다.

“소천일 00년 00월 00일”, “일포 00일”, “발인 00일” 이렇게 말이다.


 “일포?”일포가 뭐지 하며 옆에 지인에게 물었다.  

제주사람들은 장례식 첫날은 돌아가신 분의 가족들과 가까운 친인척만 모여 그 슬픔을 나누고, 출상하기 전날 손님들을 맞으며 예를 다하는 날을 말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손님 맞는 날이 정해져 있고, 장례식장에 찾아가는 날을 정해 그날 문상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런 문화도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첫날만큼은 장례를 준비하는 유족을 배려한 문화인 건 사실인 듯하다.    


 그리고 이런 경조사에 부조금은 함께 사는 아내와는 별개이다. 쉽게 말하면 내 부모 장례식 또는 내 결혼식에 받았으면 함께 사는 아내와 별개로 각자가 받은 만큼 각각 부조금을 낸다는 것이다.

한집에서 부조금 봉투가 2개가 나가는 것이다.

이 또한 공동체 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주사람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문화로 만들어 낸 것 같다.    


 공동체 문화는 이렇게 삶의 방식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여름날 서귀포 법환 포구에 용천수가 흐르는, 흔히 막숙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가족과 함께 발을 담그며 놀고 있을 때였다.


 그곳은 여름이면 시원한 용천수에 몸을 담그며 노는 아이들과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법환포구 막숙

 그때 한 어르신이 그곳에서 빨래를 하며 비눗물을 사람들이 놀고 있는 탕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흘다.   

그러자 그곳에서 놀던 어떤 젊은 아이 엄마

“어르신!!, 여기서 비누로 빨래를 하시면 어떡하세요?”

라며 눈살을 찌푸리자, 그 어르신이

“니들이 우리 빨래터에 와서 놀았지, 내가 니들 노는 곳에 빨래 물을 부었시냐?”라고 이야기한다.    


그 분위기 험한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들켜 버렸다.    

법환포구 막숙(남탕)

 그리고 그 바로 옆에남자들이 옷을 시원하게 모두 벗고 목욕을 하는 남탕(막숙)이 있다.

그곳 탕이 2군데로 나뉘어 있는데 위칸은 몸을 마지막으로 헹구는 곳이고 아래 칸에서는 물속에서 비누칠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물이 흘러나가는 배수구 앞에서는 소변을 보는 사람다.    


 그랬다, 그곳이 원래 빨래터였고 물놀이하는 장소가 아닌 멱 감는 곳이라는 사실은 관광객은 물론이고 이제 막 이주한 사람조차 생각지 못한 이곳 문화였던 것이다.    




난 아직도 이곳에서는 “육지껏”이다.

이제는 익숙해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10년이 되어도 그들에게 난 아직 육지껏 이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색달동이다.

이곳의 마을회는 지역사회 내에서도 유명하다.

이 마을에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고 10년 이상 거주하며 마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지만 마을회 정회원으로  받아준다.  


 그전 어떤 사람이 함께 열심히 겠다 해서 마을회에 가입시켰더니 얼마 지나지 않고서는 훌쩍 떠나 버리더란다.

이곳 사람들은 공동체 문화가 중요한 사람들이기에 그 사람에게 배 풀었던 정만큼이나 느꼈을 운함은 남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세 번째 제주 여행 tip

 -아는 만큼 보고, 보이는 만큼 여행은 느려진다-    


 지금은 외지인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카페들이 많아져 여행객들이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내가 처음 왔을 당시만 해도 식당이나 그 어떤 가게에 가면 퉁명스럽고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기억에는 어떤 조사에서 아마 제주도가 전국 여행지 불친절도 1위인 적도 있었다.    


 이들은 험하고 거친 땅과 파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숨비소리:해녀들이 물질하며 내쉬는 숨소리) 살아남느라 자연스럽게 생겨난 말투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조금 보태자면 70년대 이후 자본들이 제주로 몰려 그들의 삶의 터전과 살아온 공동체 문화에 적지 않게 해를 끼쳐 생겨난 배타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구멍가게를 하던 어떤 날, 가게에 자주 들르던 어르신 댁의 부고를 알게 됐지만 선뜻 찾아가 보지 못했다.

이후 장례를 치른 그 집 어르신이 가게로 찾아와 물건을  때, 묵혀둔 마음에 계산대에서 3만 원을 얼른 꺼내 흰 봉투에 담아 찾아뵙지 못해 죄송했다며 인사를 다.


 물론 그 전에도 말씀을 많이 붙여주지만 그 후로는 더욱 살갑게 대해 주고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가족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끼기도 했다.    




 나와 나의 지인들은 여름이면 바에서 스노클을 즐긴다.

어느 날 바다에서 스노클을 하고 있을 때 나이 많은 해녀 어르신들이 오더니 퉁명스럽게 “납 벨트를 찬 거냐” 묻는다. 우리는 그냥 물놀이 중이고 납 벨트는 없다고 이야기했더니 이내 잔소리를 한가득 하고서는 물속으로 사라다.     


 한참이 지나 그 해녀 분들이 무거운 망태기를 들고 물 밖으로 나오길래 얼른 물속으로 뛰어들어 망태기를 받아 들고 나와 각자 타고  오토바이에 싫어 주었더니 아까 그 퉁명스럽게 잔소리하던 분들은 어디 갔는지 없고, 연신 고맙다며 고생해서 잡아온 뿔소라를 한가득 내어 다.

제주해녀와 전복, 문어, 뿔소라

그리고 망태기 속에 해녀 어르신이 잡아 싱싱한 문어가 보여 우리는 한 마리만 팔 수 있냐며 물으헐값에 기분 좋게 내어 주었다.     


 그날 우리는 준비해 간 코펠에 문어 라면을 끓이고 뿔소라를 그 자리에서 돌로 깨어 바닷물에 씻어 맛있게 먹었더랬다.    




 내가 본 제주 사람들은 이렇게 공동체 삶 속에 익숙하여 정을 주면 한 없이 내어 주며 순수하다.


 그동안 영혼 없 친절한 말투에 익숙한 누군가는 이들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섣부르게 불친절하다 또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다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본 이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세상 순수한 사람들이다.    


 귤을 수확하는 겨울이 되면 집에 있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있지 말고 밭에 와서 일손을 거들라 하

수확철 귤

일을 시키고서는 일당을 쥐어 주기도 하고, 선과장으로 넘기고 남은 파(흠집이 있거나 크기가 크고 작은 비상품) 귤을 먹어보라며 노란색 콘테나 한가득 가져다주기도 한다.    

목장지와 고사리

 그리고 새싹이 돋는 봄이 되면 중산간 지역과 산록도로 사이 목장지에 흐드러지게 올라오는 통통한 고사리를 꺾으러 가자며 삼삼오오 한차를 만들어 다니면서 각자 싸온 도시락 먹고 함께 한다.


 돌아올 때는 각자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넣어둔 오천 원을 꺼내 기름 값이라며 운전자에게 쥐어 기도 한다.

이렇게 항상 소소하게 정을 주며, 잘살고 있는지 종종 들여다 봐 주는 듯하다.    




 제주 보목동은 자리가 유명하다.

아는 지인이 물회를 먹으러 오라 해서 참석한 자리에 왠지 모를  된장국 같아 보이는 것이 있었다.


 맛을 보라 해서 먹었더니 된장에 빙초산을 풀어놓은 상한 맛이었고, 뼈째 썰어 넣은 자리회 또한 식감이 당시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맛이 아니었다.    

보목포구와 자리물회

 자리 물회는 철이 되면 가까운 근해에서 테우를 타고 잡은 자리돔과, 제주의 땅이 척박하다 보니 고추농사가 잘 되지 않는 반면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콩 농사는 잘 되는 토질이라 이곳은 된장 문화가 더 발달된 곳이.

그러다 보니 귀한 고추보다는 흔한 된장과 시원한 용천수를 섞어 자리와 함께 만들어 먹던 이들만의 음식문화인 것이다.    


 지금은 나 역시 된장 육수의 감칠맛과 어우러진 고소한 자리돔의 뼈째 씹히는 맛을 잊을 수 없어 철이 되면 꼭 가서 몇 번씩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만약 5~6월 경 제주를 여행한다면 보목동을 들러 꼭 자리물회를 맛보길 추천한다.




 제주의 화산암 토질은 벼농사를 할 수 없는 땅이다.

일부 극소수의 지역에 벼농사가 가능 한 곳이 있긴 하지만 그 규모가 턱없이 부족 보리 또는 메밀 농사를 지었고 성산과 대정, 안덕 등의 지역은 밭작물이 가능해서 무와 감자 농사를 지으며 고픈 배를 달랬다고 한다.

군산오름 아래 메밀밭
메밀 비빔냉면과 빙떡

그래서 발달한 또 하나의 음식 문화가 메밀국수와 빙떡이기도 하다.

무더운 제주의 여름, 한 끼 식사로 훌륭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제주 사람들은 용천수를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며 서로 힘을 합쳐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제주의 마을과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우리가 예쁘다, 맛있다며 찍는 사진들 속에 담겨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고난했던 삶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천천히 느린 여행을 하며 이곳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고되었던 삶을 느낄 수 있다면 좀 더 풍부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제주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까지 담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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