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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ret service

# 45

by 더블윤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Boy's


칼리뮤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권총의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에 힘을 주며 낮게 내뱉었다.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GU 정부군의 전투복을 입은 남성은 두 손을 높이 들며 미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안도와 긴장 사이 어딘가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의심하는 태도,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는 잠시 주변을 흘깃 살펴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좋은 타이밍은 아니군요. 곧 병사들이 적하장을 샅샅이 수색할 겁니다. 시간이 없어요. 만약 내가 GU 소속이었다면, 그저 큰소리로 한 번 외치기만 하면 당신들은 이미 잡혔겠죠.”

그 말은 차갑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칼리뮤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결국 권총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그 순간, 사내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낮게 속삭였다.
“좋아요. 우선 몸부터 숨기시죠. 이쪽으로.”

그는 가까이 있던 대형 컨테이너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경첩에서 삐걱 소리가 새어 나올까 손으로 눌러가며 조심하는 모습이 오히려 그의 절박함을 보여줬다.
“들어가세요. 화물이 수송선에 실릴 때까지는 그 안이 가장 안전해요. 제가 다시 찾으러 올게요.”

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출 여유조차 없었다. 칼리뮤도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권총을 거둔 채 내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버텨주세요.”

그의 마지막 말과 함께 철제문이 닫혔다.

찰칵—.

문이 닫히자 그 사이로 들어오던 빛이 단번에 끊겼다. 우리 주위를 감싼 것은 숨 막히는 암흑과, 철로 된 벽이 만들어내는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녀가 내 곁에 바짝 밀착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말없이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내 팔에 닿은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 떨림의 근원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그리고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그 어둠에 대한 기억.

나는 살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차가운 손을 감쌌다. 내 체온이 전해지자 그녀의 손끝이 움찔하더니, 조금씩 그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바깥에선 사람들의 분주한 발소리와 기계들이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컨테이너 벽을 타고 퍼져오는 진동이 우리를 더욱 숨죽이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의 바닥이 기울며 몸이 살짝 쏠렸다. 곧이어 거친 충격음과 함께 컨테이너 전체가 덜컹이며 흔들렸다.

우리가 들어 있는 이 화물이, 거대한 기계팔에 의해 수송선 내부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소피가 알려준 정보대로 라면, 이제 우리가 향하는 곳은 달, 루나포트였다.




주변의 소음이 차츰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끝에야 무겁게 잠겨 있던 컨테이너의 문이 삐걱이며 다시 열렸다.

“오래 기다렸죠? 이제 수송선은 출발했어요. 일단 여긴 안전해요.”
우리를 그 좁은 공간에 숨겨 두었던 그가 얼굴을 내밀며 속삭였다.

나는 칼리뮤와 눈빛을 교환한 뒤, 조심스레 문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넓고 고요한 화물 격납고, 은은하게 드리운 조명빛 아래에서 마침내 우리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검은 복면을 벗어던진 그의 얼굴은 또렷했다.
앳된 인상, 약간 상기된 볼, 그리고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눈매.

그가 짧은 갈색 곱슬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이제야 직접 만나 뵙네요, 노라. 제 이름은 딜런, 딜런 킴이라고 합니다. 블레어 킴의 동생이죠.”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블레어 킴…? 내가 아는 그 블레어요?”

“맞아요!”
딜런의 목소리는 왠지 모를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누나를 통해 당신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뵈니… 솔직히 누나가 말하던 것보다 훨씬 더 미남이시네요.”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농담조로 말을 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럼… 블레어도 지구의 자녀 소속이에요...?”

딜런은 근처에 놓여 있던 작은 화물 상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네, 맞아요. 사실 우리 누나는 오르비트 출신이 아니에요. 우리는 화성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누나는 오래전에 오르비트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고, 지구의 자녀를 위해 수많은 정보들을 제공해 줬죠.”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누나가 가장 최근에 전해 준 정보는… 아주 흥미로웠어요! 외계에서 온 존재에 관한 것, 그리고 그들을 지키려 했던 한 연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블레어를 처음 알고 지낸 게 벌써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가 자기 과거에 대해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구의 자녀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녀가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 격앙되었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구의 자녀 요원들이 어떻게 휴고를 통해 나와 접촉할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그래서 이제 계획이 뭡니까? 우린 원래 화성으로 가려던 게 아니었나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 대신, 칼리뮤가 날카롭게 물었다.

딜런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이내 곧장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 음… 계획이 조금 바뀌었어요. 지금 화성의 상황이 좋지 않거든요. 수많은 군용 함선들이 화성 궤도에 정박 중이에요. 그곳의 경계는 이전보다 훨씬 더 삼엄해졌죠. 우리 쪽에서 확보한 함선으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해졌어요. 하지만 이 수송선은 달라요. 출처가 명확한 군용 함선이면서도, 책임 장교 중 한 명이 이미 우리 쪽 사람이죠. 반쯤은 우리 손에 있는 배나 다름없어요.”

그 순간, 나는 적하장에서 보았던 덩치 큰 장교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감이 목구멍을 죄어 왔다.

“그래서 달로 향하는 겁니까?”
나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오히려 군인들이 제일 많이 집결해 있는 곳으로요?”

딜런은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지금은 대부분의 병력이 화성에 투입돼 있어서 루나 포트엔 병력이 많지 않아요. 게다가…” 그는 의미심장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오르비트에서도 저항의 불씨가 타올랐다는 소식이 들어왔더군요. GU는 이제 금성에도 적을 두게 된 셈이죠. 조만간 루나 포트의 잔여 병력도 그쪽으로 차출될 가능성이 커요.”

나는 리암의 얼굴을 떠올리며 얼른 물었다.
“오르비트의 상황은 지금 어때요?”

딜런은 팔짱을 낀 채 뒤로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우리 쪽 정보원에 따르면 혁명 세력이 치안본부를 완전히 점령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곧 오르비트의 기존 질서는 무너질 거예요. 이미 우리 요원들 일부가 그곳 소요 사태를 지원 중입니다. GU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상황이겠죠.”

그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가장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는 폭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고, 군이 움직인다면 피할 수 없는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할 터였다.
그러나 정작 딜런은 그것을 거의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무심함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단지… 평범한 삶과 자유를 원했을 뿐이에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자 한 것뿐인데, 당신들은 그들을 이용하려 하고 있어요.”

딜런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고, 목소리가 낮고 단단해졌다.
“우리 모두가 같아요, 노라. 우리라고 이 위험한 투쟁을 즐기며 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렇게라도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세상 속에서, 의미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질 뿐이에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 말했듯이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에요. 그것을 얻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걸, 우리는 희생이라 부르죠.”

“그 희생 끝에 얻으려는 자유가 도대체 뭐죠? 수많은 죽음을 통해… 대체 뭘 얻으려는 겁니까?”
내가 거칠게 물었다.

딜런의 눈빛이 매섭게 흔들렸다.
“진실 그리고… 인간, 우리의 존재 그 자체요.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의 본향을 향한 의지이죠.
당신은 몰라요, 노라. 나와 누나가 화성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엇을 보고 자라왔는지. 그 번영의 이면에 가려진 억압을 당신은 결코 경험하지 못했어요.
죽음을 통해 무얼 얻냐고요? 화성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삶을 살고 있어요. 우리는… 기계 속의 부품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의 묵직한 말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확실히 나는 그들의 삶을 알지 못했고, 화성인들이 어떤 어둠 속에서 살아왔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르비트의 열악함이 그곳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처럼, 화성의 풍요로움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그제야 비로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제가… 조금 흥분했어요.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딜런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저도 방금 그랬는걸요. 그러니 비긴 걸로 하죠.”

나는 순간적인 안도감에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 부탁 하나만 할게요. 휴고에 대해서도 당신 누나를 통해 들었겠죠? 그와 그의 가족들을 찾아서… 꼭 보호해 주세요. 그들은 이 혼란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단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일 뿐이에요.”

내 말에 딜런은 잠시 말을 잃은 듯, 한동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가는 갈등이 보였지만, 곧 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그는 곧 휴대 단말기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잠시 돌아가야겠어요. 먹을 걸 챙겨서 다시 올게요.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제가 없는 동안엔 컨테이너 안에 숨어 있는 게 좋을 거예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문턱에 이르러서야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바닥을 탁 치며 다시 돌아섰다.
“아, 참! 가장 중요한 걸 빠뜨릴 뻔했네요.”

나와 칼리뮤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딜런의 얼굴은 여전히 약간의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루나 포트로 향하고 있지만, 거기가 최종 목적지는 아니에요.”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지고, 비밀을 흘리는 듯 묘한 힘이 실렸다.
"우린 지구로 갈 겁니다."

“지구요?”
나와 칼리뮤가 동시에 되물었다.

“네. 우리 ‘지구의 자녀’가 늘 외쳤던 말, 들어보셨죠? 지구는 이미 회복되었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 GU는 그걸 허무맹랑한 주장이라고 해왔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의 눈빛은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구엔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내 입술이 저절로 열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질문들이 목구멍에 걸려 올라왔으나, 그 순간 딜런은 급히 시계를 흘끗 보더니 손을 흔들며 적재함의 문으로 달려갔다.

“늦겠네요! 나머지는 이따가 마저 얘기해요!”

그의 목소리가 적재함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 철문이 닫히며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한참 동안 그 문을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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