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2115년. 인류의 존속을 위해 시작된 대규모 화성 이주 프로젝트, ‘적색 이전(Red Exodus)’.
그 방주와도 같은 우주선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몸을 실어 화성으로 향했지만, 모두가 그 혜택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매일같이 거대한 함선들이 지구에서 떠올라 붉은 행성을 향했지만, 지구 위의 모든 인류를 실어 나를 수는 없었다.
결국, 그 과정에서 남겨진 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종말을 기다리는 운명에 내던져졌다.
남겨진 사람들의 수는 해가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푸르던 대지는 황무지로 변했고, 매 순간 높아져 가는 해수면은 그나마 남아 있던 식량생산이 가능한 땅들을 집어삼켰다. 생물종은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 갔고, 그 멸종의 연쇄사슬은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끊임없이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포기를 거부한 자들이 있었다.
스스로 지구에 남기를 택한 각계의 지성인들과, 이들과 뜻을 함께한 이들은 마지막 희망을 붙들었다. 지구에 남은 모든 기술과 지성, 그리고 자원은 단 한 가지를 향해 집중되었다.
‘지구의 회복.’
인류의 탄생이래 처음으로, 그들의 모든 의지와 의식은 그 목표 하나로 수렴되었다.
유전자 편집 기술은 남아 있는 생물종들에게 적용되었다. 혹독하게 변해가는 기후에 맞추어, 종들은 빠르게 적응했고, 마침내 전혀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났다.
탄소 포집 기술은 대기 속 탄소 농도를 조금씩 낮춰갔고, 그 결과 오랜 시간에 걸쳐 하늘은 다시 파란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은 포집된 탄소로 석회석을 만들어, 하얀 건물들을 세우며 새로운 도시를 일구었다.
지구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치유되어 갔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인류는 또 한 번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들은 회복되어 가는 지구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한때는 찬란한 자연의 경이를 보여주었으나 이제는 산호초들의 무덤이 되어버린 호주 퀸즐랜드의 대보초 위에, 높이가 1km에 이르는 거대한 첨탑을 세웠다. 그리고 그 안에, 인류의 어두운 과거, 되찾은 희망, 그리고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겨 넣었다. 지구와 인류의 영원한 공존을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 순백의 석회로 쌓아 올린 건축물은 ‘생명의 탑’이라 불렸다.
대양의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 있던 ‘생명의 탑’은, 지구인들에게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황폐했던 땅이 회복되었음을 알리는 증거였고, 다시 살아난 지구의 심장이었으며, 끝내 포기하지 않은 인간의 의지였다. 첨탑은 밤마다 달빛과 어우러져 마치 하늘과 맞닿은 기도의 형상처럼 빛났다.
그러나,
그 생명의 탑은 결국 무너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인간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적색 이전 이후 약 200년.
지구는 잿더미 속에서 기적처럼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황폐했던 땅엔 다시 초목이 자라났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었다.
매년, 지구의 재건자들은 달의 루나포트로 자신들의 성과와 기록을 보냈다. 무너졌던 도시가 흰 석회 건축으로 다시 빛나고, 인간과 새롭게 태어난 생명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그들에겐 자부심이자 희망이었다.
그러나 GU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침묵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구의 회복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질서와 체제의 유지였다.
‘적색 이전’의 내러티브, "지구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라는 바로 그 선언을 통해 권력을 손에 쥐었던 GU에게 지구의 회복은 곧 정권의 정당성을 무너뜨릴 위협이었다. 지구가 살아났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지구를 버린 정권”이라는 낙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지구는 인류 문명의 상징적 중심지였다. 만약 다시 재건된다면, 지구에 끝까지 남아 싸운 이들에게 권력의 정당성이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GU는 지구를 감시망으로 철저히 봉쇄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단 하나의 선언만을 반복했다.
“지구는 폐허다. 지구는 죽었다.”
하지만 그들의 거짓은 오래가지 못했다.
2290년, 지구의 메시지가 마침내 봉인을 뚫고 퍼져나갔다.
"지구는 살아났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지구에서 발신된 신호는 루나포트뿐만 아니라 화성과 금성으로도 전해졌다. GU는 이를 즉시 차단했지만, 그 한 줄의 진실은 인류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불씨였다.
GU의 수뇌부는 체제 유지를 위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지구에서 보낸 메시지를 가로챈 일이 있은 후 몇 달이 지난 뒤, 루나포트의 발사대에서 수십 기의 소행성 요격 로켓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그날, 로켓들이 향한 곳은 우주가 아니었다. 그 로켓들은 인류의 고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하늘을 가르는 눈부신 섬광이 새롭게 태어난 도시와 마을 위로 떨어졌다.
재건된 도시들은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고, 초록빛을 회복하던 대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단 하루 만에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사람들은 다시 한번 종말의 악몽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폭격은 끝이 아니었다.
GU의 무인기들이 대기권을 뚫고 내려왔고, 각종 미사일과 탄약을 무고한 사람들을 향해 쏟아부었다. 도시는 무너져 내렸고, 인류가 잊고 있었던 화약 냄새와 총성이 다시 지구의 공기를 물들였다.
무차별 폭격은 지구에 남은 인류의 자부심 마저 무너뜨렸다. 미사일이 떨어진 생명의 탑의 하부가 불길에 휩싸이며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석회의 하얀 외벽이 벗겨져 나가며 흰 가루가 폭풍처럼 날렸고, 그 모습은 마치 눈보라가 한여름의 하늘을 덮는 듯했다. 균열은 삽시간에 위로 번져가며, 사람들의 비명은 땅의 진동과 뒤엉켜 울려 퍼졌다.
“생명의 탑이… 무너져요!”
누군가의 절규와 함께, 탑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거대한 첨탑이 무너져 내리며 내뿜은 소리는, 대륙 전체에 메아리치는 종말의 소리 같았다. 수십만 톤의 석회와 강철이 산처럼 무너져 내리며 도시를 삼켰고, 흰 먼지는 피 묻은 하늘과 뒤엉켜 기괴한 붉은 안개로 변했다.
탑이 무너졌고, GU가 그날 무너뜨린 것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탑의 붕괴는 지구인들의 가슴속에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분노의 목소리들이 거리에서, 숲에서,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날, 지구의 인류는 무너진 탑의 잔해 위에서 복수와 저항의 의지를 가슴에 새겼다.
그 순간, 잿더미와 피 위에서 새로운 이름이 태어났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구의 자녀’라 불렀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삶과 존재를 지키기 위해,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불꽃은 지구에만 머물지 않았다.
루나포트에서 근무하던 과학자들과 군인들조차 GU의 잔혹한 명령 앞에 흔들렸다. 질서를 위한 거짓, 통제를 위한 폭력. 그것을 대의라 믿고 따르던 이들조차, 지구 침공과 학살을 목격한 순간 자신의 마음속 살아있는 양심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몇몇은 비밀리에 지구 회복 데이터와 GU의 학살명령을 빼돌려 화성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진실은 서서히 퍼져나갔다. 숨겨졌던 기록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꺼져가던 불씨에 불을 붙였다. 가뜩이나 GU의 정책에 불만을 품어왔던 사람들은 지구와 뜻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실은 곧, 저항의 불길이 되었다.
"지구는 살아있고, '지구의 자녀'는 지구인들이 만든 단체이다... 그게 정말 사실인가요...?"
나는 다시 돌아온 딜런의 입에서 나온 긴 이야기를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의심과 혼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예요, 노라. 하지만 그것이 명백한 진실이죠."
딜런은 단호하면서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블레어는... 왜 이런 이야기를 내게 단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었던 거죠...?"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딜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마 누나는 당신을 지키고 싶었던 거겠죠. 진실이라는 것은... 때론 위험하니까요."
그 말을 듣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납득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 블레어라면 나를 위험에서 멀리 두기 위해, 굳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그녀가 ‘지구의 자녀’ 이야기를 꺼냈던 것도 내가 먼저 코라의 적재함에서 ‘총’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결코 GU 내부의 정치적 상황을 언급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구로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죠? 애초에 그곳으로 갈 수 있기는 한 겁니까?"
칼리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단단히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싸늘한 냉기가 어려 있었다.
"음..." 딜런은 잠시 시선을 떨군 뒤,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조직의 뿌리는 지구에 있지만, 지금까지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 외에 직접 지구인을 마주한 적은 없어요. 저희 입장에서도 지구로 향한다는 건 큰 도전이 맞아요."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 아닙니까?"
칼리뮤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딜런의 얼굴에 짧은 그늘이 스쳤다. 곧 그는 숨을 길게 내쉰 뒤,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칼리뮤 씨,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네요. GU의 눈 밖에 난 이상, 이 태양계 안에서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의 말에 칼리뮤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나 역시 말없이 그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딜런은 여전히 담담하게, 마치 불편한 진실을 짚어내듯 말을 이어갔다.
"우리 조직은 점점 약화되고 있습니다. GU의 강경한 대응은 서서히 효과를 보고 있고요. 더는 숨어서 조용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가 없어요. 반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구에 있는 ‘지구의 자녀’ 수뇌부는 그 열쇠가 바로... 당신에게 있다고 결론지었죠."
딜런의 시선이 칼리뮤를 향했다.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칼리뮤를 바라보았다. 칼리뮤의 눈이 크게 흔들리며 놀람을 드러냈다. 그녀는 무겁게 입술을 깨물고, 곧 딜런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딜런은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로쉬 박사가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어요. 정확히는... 당신이 지니고 있는 물건을 원하는 거겠죠. 당신의 등 뒤에 매달고 있는 그것을 말이에요."
순간, 칼리뮤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였다. 그녀는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며, 허리춤에 손을 뻗어 권총을 꺼낼 태세를 취했다. 눈빛은 경계와 긴장이 가득 차 있었고, 그 손끝에는 언제라도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딜런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낮게, 그러나 확실하게 덧붙였다.
"우리의 예상이 맞다면, 그건 가공할 위력을 지닌 코어리움 폭탄이에요. 코라에서 벗어날 때, 당신이 그것을 한 번 사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내 말이 맞죠?"
그 말에 나는 탐사선 코라에서 탈출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건 아주 소량의 코어리움이에요. 정제된 힘이죠. 이 장치를 우주 공간에서 폭발시키면, 플라즈마와 충격파가 일어나요. 잠깐이지만… 작은 별이 되는 셈이에요.’
그날, 칼리뮤의 그 말과 함께 보았던 눈부신 폭발, 순식간에 공간을 집어삼켰던 빛과 충격파.
만약 그녀가 지금 갖고 있는 팔뚝만 한 크기의 캡슐이 그와 같은 성질의 것이 맞다면... 그 안에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힘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왜 태양계 안에 그러한 물건을 가져온 것일까. 도대체 그녀의 임무는 무엇이었던 것일까.
나는 칼리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딜런의 말은 거짓이라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딜런의 머리로 겨누었다. 딜런의 말이 사실임을 그녀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딜런의 표정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침착하게,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예요. 첫째, 여기서 저를 쏘고 GU 군인들에게 붙잡히는 것. 둘째, 우리와 함께 지구인들을 돕고, 두 분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
그가 천천히 칼리뮤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칼리뮤의 손가락은 방아쇠 위에서 떨렸다. 그녀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눈빛은 흔들렸다.
"부디... 우리를 도와주세요."
마지막으로 내뱉은 그의 목소리에는 차분한 표정과 달리, 간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칼리뮤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권총을 더욱 움켜쥐었다. 나 역시 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세 사람을 휘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