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우리는 디에와 딜런에게 지구로 함께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코어리움 폭탄의 소지에 대해서는 칼리뮤가 계속 보관하되, 사용 여부는 지구에 도착한 뒤 논의한다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딜런은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디에는 달랐다. 그의 얼굴에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우린 절박해.”
그가 낮게 말했다.
“부디 잘 협력해 줬으면 좋겠군.”
짧은 말이었지만, 그 속엔 간절함과 경계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수송선이 루나포트 궤도에 진입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우리는 창문 하나 없는 어두운 적재함 안에서, 단 한마디 말도 없이 그 긴 시간을 견뎌냈다.
진동이 잦아들고, 엔진음이 점점 낮아질 때쯤, 딜런이 무전기를 내리고 급히 걸어왔다.
“어서 이 옷으로 갈아입어요.”
그의 손에는 검은색 전투복과 헬멧, 그리고 얼굴을 가릴 복면이 들려 있었다.
“이건…?”
내가 묻자 딜런이 짧게 웃었다.
“지금부턴 당신들도 GU 소속의 군인이에요.”
그의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눈빛만큼은 진지했다.
“아무 말하지 말고, 저만 잘 따라오면 문제없을 거예요.”
그의 말이 끝나자, 금속 바닥 아래로 진동이 한 번 크게 울렸다.
착륙이었다.
나는 잠시 칼리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투복을 받아 들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은 차분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짧고 조용한 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 있었다.
우리는 딜런을 따라 화물 격납고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하선을 위해 해치 앞에 줄을 선 군인들 사이로, 아무 일 없는 듯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수송선의 또 다른 장교, 아들러라는 인물이 우리를 잠시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의문에 싸인 시선이 오래 머무는 듯했지만, 곧 디에가 그를 부르며 대화를 이어가자, 그는 미련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그 덕분에, 우리의 위장은 들키지 않았다.
“이곳에 내리면 대부분의 병사들은 보급품과 코어리움 원석을 하역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예요. 우린 그 틈을 이용해 지구 순찰용 셔틀에 올라탈 예정이에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송선의 해치가 공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열렸다.
‘칙—’ 하고 울린 압력 해제음 뒤로, 눈부신 백색 조명이 선내를 가득 채웠다.
거대한 루나포트 착륙장. 착륙장 바깥에는 수많은 지게 로봇들이 무거운 화물을 나르고 있었고, 로버를 탄 인부들과 병사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우리가 탄 수송선과 같은 함선이 여러 대 더 착륙해 있었지만 드넓은 착륙장의 반도 차지하지 않았다. 거대 탐사선 ‘코라’조차도 무리 없이 착륙할 수 있을 만큼의 넓은 공간의 착륙장이 몇 개나 더 있다는 사실은, 이 루나포트의 거대한 규모를 더욱 실감하게 했다.
천장 위로는 반투명한 개폐식 유리 돔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거대한 구체 하나가 떠 있었다.
지구였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가장 아름다운 행성, 모든 생명의 고향, 그곳에서 태어나고, 그곳을 잃은 인간의 후손이 지금 다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숨을 멈춘 채, 눈을 떼지 못했다.
“노라...!”
칼리뮤의 조용한 외침이 내 귓가를 스쳤다.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와 딜런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착륙장과 루나포트 내부 기지를 잇는 문이 열리자, 거대한 화물 트럭들과 지게 로봇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를 비집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통로를 건너, 인적이 드문 복도로 방향을 틀었다.
딜런이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 말했다.
“이제 디에 씨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일반 사병의 접근 권한으로는 셔틀에 탑승할 수 없어요.”
그의 말이 끝난 직후, 복도 끝 모퉁이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왔고, 곧이어 덩치 큰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디에는 말없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묵묵히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군화 밑에서 울리는 발소리가 복도의 금속 벽을 타고 길게 메아리쳤다.
우리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셔틀 발사장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몇몇 인부들이 디에를 흘겨보며 지나쳤지만, 딜런의 말처럼 루나포트에 남아 있는 병력은 거의 남지 않은 듯 보였다.
기지 전체는 넓고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정적 속에는 묘한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공기는 깨끗하지만 너무 인공적인 느낌이었다. 그 느낌조차 나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듯했다.
“거의 다 왔어요.”
딜런이 속삭였다.
그러나 그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발사장 입구 근처에서 두 명의 무장 군인이 디에의 앞을 막아섰다.
“자네들은, 뭔가?”
디에가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말이 아니라, 총기의 차가운 금속음이었다. 그들의 소총이 동시에 들어 올려졌고, 총구가 우리 쪽을 향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디에가 굵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다음에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 낯익고, 차가운 음색이었다.
“그거야, 그들은 명령을 수행하는 게 아니겠나... 디에 파트리스 소령.”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숨이 멎는 듯한 감각. 한 번 들은 적 있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 벽면의 금속 패널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며, 그곳에 한 사람의 형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어디서 나왔는지 한 무리의 무장한 군인들이 서있었다.
“로쉬…?”
디에가 뒤를 돌아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홀로그램에 떠오른 로쉬의 얼굴을 보자, 그의 눈에 놀람과 분노가 동시에 일렁였다.
“자네에게 실망이 크네.”
로쉬의 목소리는 여전히 젊고, 침착했다.
“훌륭한 군인이라고 생각했었지. 병사들도 자네를 존경했어. 그런데, 하찮은 감상에 젖어 무지한 자들과 뜻을 함께하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
디에의 얼굴에 핏줄이 서며 굳어졌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로쉬의 홀로그램은 미동도 없었다.
로쉬의 시선이 천천히 우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복면 너머로 우리를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차분히, 그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까진 듯하군, 노라 그린비.”
내 이름이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영영 자네를 못 찾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하지만 그간의 행적은 꽤 인상 깊었어. 잠시였지만, 덕분에 내 계획이 틀어지는 건 아닌가 걱정했거든.”
그의 목소리는 마치 실험실에서 시료를 관찰하듯, 차갑고 감정이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노려보았다.
“부디 이들과 함께 얌전히 코라로 돌아오게.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놔야 하지 않겠나.”
홀로그램 속의 로쉬가 마지막 미소를 짓자, 그 형체를 이루던 빛이 서서히 흔들리더니 꺼져버렸다.
잠시 정적. 그리고, 로쉬의 홀로그램이 사라지자마자 뒤에 서 있던 한 무리의 병사들이 수갑을 꺼내 들었다. 철제 구속구가 서로 부딪히며 짧고 건조한 소리를 냈다.
“파트리스 소령님… 당신을 반역죄로 체포하겠습니다. 부디 아무 저항도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앞에 있던 병사가 약간은 주저하며 말했다.
그 뒤에선 네 명의 무장 군인들이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광택이 나는 총구 아래에 비살상용 전기 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작은 모듈이 달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디에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와 수갑을 꺼내든 병사를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두득!
비명과 함께 병사의 팔이 비틀려 뒤로 꺾였다. 디에의 손이 상대의 손목을 붙잡아 그대로 어깨 뒤로 꺾어버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디에의 몸이 거대한 덩어리처럼 회전했다. 비명과 함께 병사의 몸이 그대로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뒤편에 있던 두 병사가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전기 테이저탄환이 날아가며 디에의 어깨에 꽂혔다. 붉은 불빛이 깜박이며 전류가 흐르자, 디에의 몸이 한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그뿐, 그는 쓰러지지도, 작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한 번 움찔 떨곤, 그 두꺼운 손가락으로 탄환을 뽑아냈다. 한 마리의 검은 야수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디에는 여전히 붙잡고 있던 병사를 그대로 방패 삼아 앞으로 밀어붙였다. 육중한 몸체가 벽에 부딪히며 커다란 소리가 좁은 복도에 울렸다. 몇 미터나 밀려난 병사가 허공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뒤에 있던 또 다른 병사가 놀라 방아쇠를 당겼지만, 발사된 전기 탄환은 방패 삼은 병사의 등에 박혔고, 전류가 번쩍이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젠장!”
뒤쪽에서 병사 한 명이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디에는 그 쓰러진 병사의 몸을 잡아채어 짐짝 던지듯 나머지 둘에게 내던졌다.
좁은 금속 통로 안에서 사람의 몸이 날아갔고, 충돌음과 함께 두 병사가 뒤엉켜 넘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몸을 가누고 일어나려는 순간, 이미 디에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 위를 덮고 있었다.
문 앞을 지키던 다른 병사들이 급히 총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칼리뮤가 움직였다. 그녀의 몸이 그림자처럼 미끄러졌고, 단 한 발자국의 소리도 없이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팔꿈치가 한 병사의 턱을 정확히 강타했고, 다른 손은 재빠르게 그의 손목을 꺾었다. 그리고 그의 총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칼리뮤의 무릎이 복부를 강타했다.
짧은 숨소리, 그리고 쓰러짐. 바로 옆에서 딜런이 몸을 날려 쓰러진 병사 위에 올라탔다. 그는 재빨리 병사의 손에서 소총을 빼앗았다. 딜런이 빼앗은 소총을 쓰러진 병사에게 겨누자 마지막 남은 병사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이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복도는 금속이 울리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로 가득했다.
디에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바닥에 쓰러진 채 손목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병사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 병사의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주사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진통제다.”
그가 낮게 말했다. 그리고 병사의 허벅지에 주사기를 꽂았다.
“곧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참게.”
병사는 흐릿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디에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어깨에는 여전히 탄환이 박힌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바닥에 떨어진 소총을 들어 올리며 짧게 말했다.
“서둘러 이동해야 해. 추격자들이 올 거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의 전투보다도 더 강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