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지금 이 인간 남성은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있다. 그는 선택지가 둘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겐 세 번째 길이 있었다. 지금 여기서 이 남자를 제거하고, 노라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나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다.
나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차가운 금속의 압력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묵직한 방아쇠가 천천히 뒤로 당겨지고 있었다.
그때, 노라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총구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진정해요, 칼리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나는 눈앞의 검은 동공을 응시했다.
“비켜줘요. 저는 네리안의 기술을 지키기 위해 이자를 제거해야만 해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하지만 노라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를 가로막듯이 한 손을 천천히 올린 채 몸을 돌려 딜런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물건으로 무얼 하려는 거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딜런에게 물었다.
“폭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진 않죠.”
“이건 인간들의 물건이 아니에요. 애초에 이곳에 있어선 안 될 물건이에요. 그러니 칼리뮤를 그냥 보내줘야 해요.”
"GU가 먼저 그 물건을 포기한다면, 우리도 그럴 의향이 있네."
그때, 격납고의 문 쪽에서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총구를 그 소리 쪽으로 돌렸다.
문턱에 서 있던 이는 우리가 격납고에 들어오기 전 보았던, 검은 피부의 덩치 큰 장교였다.
“디에 씨…”
딜런이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디에는 느릿하게 걸어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그의 존재 자체로 격납고 안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그가 노라를 바라보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협력한다면, 자네와 저 여인의 안전은 우리가 책임지겠네. 그리고 그녀가 동족에게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그리곤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직설적이면서도 어딘가 예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외부에서 오신 분, 부디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 물건을 빼앗아가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 가진 그 기술로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겁니다. 당신은 이미 인간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그러니 인간을 위해, 그 보답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나는 숨을 고르고 그를 노려보며 답했다.
“내가 보답해야 할 사람은 노라예요. 당신들이 아닙니다.”
디에는 미세하게 눈썹을 올리며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노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부탁을 해야겠군, 노라 그린비. 부디 그녀를 설득해 주게. 자네와 저 여인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녀가 필요하네.”
노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차가운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디에는 그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딜런을 향해 손짓을 하며 말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해 보이는군... 블레어는 자네 안위를 매우 걱정하고 있네. 자넨 어떤가? 어디에 설 것인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길 바라네.”
두 사람은 격납고 문을 지나 자취를 감추었다. 문이 닫히며 남긴 금속음이 공간에 길게 울렸다.
그제야 나는 천천히 총을 내리고 노라를 바라보았다. 노라도 겨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격납고 안의 공기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우리 사이의 공허한 공간에선 금속이 식는 소리와 환기팬의 낮은 진동음만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 위로 걸린 파란 조명빛이 희미하게 흔들리며 노라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푸른빛 아래, 그의 얼굴은 피로와 혼란, 그리고 어딘가 상처받은 듯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칼리뮤…”
그가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저들의 말이 사실인가요? 그거… 폭탄이 맞아요?”
“네. 맞아요.”
나는 최대한 담담히 말했다.
노라는 숨을 들이쉬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혹시… 당신의 임무가 뭔지 말해줄 수 있어요?”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노라. 그건 알려줄 수 없어요.”
그의 미간이 깊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그 임무에 그 폭탄이 관련되어 있나요?”
대답할 수 없었다. 무수히 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그 어떤 것도 노라를 이해시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내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노라가 다시 물었다.
“그걸… 인간을 향해 사용할 계획이었나요?”
“나는… 당신에게 말해줄 수 없어요.”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
“하… 바보같이…”
그가 고개를 숙이며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 왜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지…?”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라.”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에는 실망과 불신, 그리고 여전히 남은 믿음이 뒤섞여 있었다.
“내 말 잘 들어요.”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굽혀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당신에게 모든 걸 말해줄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내 이름과 종족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요.”
나는 그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이 폭탄이 이 항성계 안에서 사용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부디... 저를 믿어주세요.”
잠시의 침묵이 이어졌다.
노라는 마침내 고개를 떨구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풀어졌다.
“후…”
그가 떨림이 섞인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 속엔 약간의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당신을 믿을게요."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저들이 원하는 것처럼, 이 폭탄으로 그들을 돕는 일도 없을 거예요.
이건, 지금은 그저... 이 항성계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일 뿐이에요.”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도 당신 말에 동의해요. 지금 지구의 자녀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요. 당신이 가진 그 물건은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겠지만… 그건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불러올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전쟁을 막아야만 해요.”
노라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어떻게요? 당신은... 미안하지만 당신에겐 그럴 힘이 없어요."
전쟁은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시작되거나 멈추지 않는다. 전쟁을 겪어본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면, 지구의 자녀의 리더를 만나 설득해 볼 거예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이미 침공을 당했어요. 정부군과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는 지금의 그들에게, 당신의 말이 통할 리 없어요.”
“당신 말이 맞아요...”
노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이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그의 그 말은 단단했다. 그 결의가 공기 속에서 울림처럼 퍼져나갔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처럼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이들이 더 많았다면, 나는 그 참혹한 전쟁을 겪지 않았을까. 그 수많은 상실의 밤을 견디지 않아도 되었을까.
노라의 존재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선택은 비합리적이었고, 때로는 위험했다. 그는 항상 쉽지 않은 길을, 어쩌면 불가능한 길을 걷고자 해왔다. 그러나 그의 그런 모습이 언제나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그를 벨시안으로 데려가려 했다. 이제 노라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이 되었으니, 내가 그를 데려가는 것만이 그의 선의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와 함께 가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곳을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히려 그런 그의 모습이, 나는 좋았다.
그의 선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건 나에게 없는,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입을 열었다.
“다음 목적지는 정해졌네요.”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함께 지구로 가요, 노라. 당신이 나를 구해줬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당신을 돕겠어요. 내 힘이 닿는 한, 당신 곁에서.”
노라가 고개를 들었다. 노라는 내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이네요… 악수는.”
“우린 동료잖아요.”
“당신은… 정말 틀린 말을 하지 않네요.”
잠시, 우리의 손이 맞닿은 채 멈춰 있었다. 그 짧은 접촉 속에서 나는 묘한 평온을 느꼈다.
노라의 손은 따뜻했다. 그 온기가 내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번져왔다. 격납고의 조명은 고개를 든 노라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전의 전쟁에서 느껴본 그 어떤 빛보다, 지금 내 앞의 이 인간이 더 강하게 빛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