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生

2-1. 배움이 키우는 삶(2)

by 더블윤


대한민국에선 만 7세부터 만 15세의 어린이에게 특정한 직업을 의무적으로 갖게 한다. 그 의무적 직업을 갖지 않으면 아이의 보호자는 과태료 등의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이 무슨 해괴한 이야기냐고 생각하지 말자. 그 직업의 이름은 바로 '학생'이니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국민이라면 예외 없이 누구나 강제적으로 지켜야 할 4가지 의무가 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근로의 의무, 그리고 교육의 의무이다.
이들 중 교육의 의무라 함은 자녀의 보호자가 그 자녀로 하여금 초등교육 등 의무교육을 받도록 할 의무를 말한다.
의무의 주체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교육을 받아야 할 자녀를 가진 보호자이다. 일반적으로 친권자가 이에 해당하지만, 미성년후견인 등도 이에 포함된다. 가끔 스스로가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하는 의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자녀 혹은 피보호자를 교육시켜야 하는 의무이니 혼동하지 않길 바란다.

교육의 의무로 인해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는 '학생'이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학생(學生).
바로 진정한 ‘배움의 존재’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학생이라는 이름에는 배움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 스스로를 길러내며 자라나는 생명이란 뜻이 담겨 있다.

이제 학교에 다니게 된 아이들은 '학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학업'이라는 업무를 수행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배움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학생’을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하지만 학생이란 단지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는 이를 뜻하지만은 않는다. 학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학생이란 배움을 살아내는 존재, 삶의 중심에 배움을 두고 살아가는 한 인간의 한 시기, 혹은 한 정신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학생은 배우는 것(學)을 자신의 업(業)으로 삼는다.

업(業)이라는 한자어를 보면 나무틀에 널빤지를 세로로 건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다. 이는 ‘기틀’, 즉 무엇인가를 엮고 만들어내는 틀을 의미한다. 여기서 파생된 뜻이 ‘일, 행위, 만들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업이라는 한자어는 우리가 행위하는 것을 뜻하는 다양한 단어에 사용된다.

직업(職業)이란 생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하는 ‘짓는 행위’를 뜻하고, 업적(業績)이란 쌓아 올린 행위의 흔적을 의미한다.


따라서 '업'이란 ‘짓는 것,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한다. 단순히 직업이나 생업으로서의 ‘일’을 넘어서, '인간이 삶을 통해 짓는 행위'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업'이란 ‘존재의 흔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학생(學生)’이 '학업'을 통해 무엇인가를 ‘짓는 존재’라면, 그가 짓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형태와 삶의 궤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유아기의 배움이 존재의 성장을 이끌었다면,

학생의 배움은 '나'라는 존재를 재구성하는 단계인 것이다.




별로 와닿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우린 분명히 학교에 다녀봤지만 '나'라는 존재가 재구성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전 장에서부터 배움은 존재를 다시 쓰며, 교육은 존재를 변화시킨다고 계속해서 말해왔다.
이번에는 그 메커니즘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그것을 위해 '존 가드너'의 <자기 갱신>'앨리슨 고프닉'의 <이론-이론>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자.


1. 문제제기

학교에서 실시되는 교육은 분명하고도 논리적인 지식을 소개해준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처음 접해보는 교과내용, 사유를 이끌어주는 과제, 생각들을 비교해 보는 토론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순진한 이론'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존의 세상이 흔들리게 되고 문제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고프닉 이론의 '작은 과학자'에게 새로운 관찰결과를 제공해 주며, 기존의 가설을 재검토하도로 만들어 주는 것과 같다. 그리고 가드너가 주장한 것처럼 자신의 가설에 오류가 있음을 깨달은 학생은 현상태에 대한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2. 인지충돌

자신의 기존 이론에 오류가 있고, 가설에 대한 증명(실험)에 실패한 학생들은 '왜? 어떻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더 깊은 사고를 가능케 만들어준다.
이때 학생들은 '이론-이론'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가설을 수정하거나, '자기 갱신'에서 말한 것처럼 낡은 틀을 과감하게 내려놓는 용기를 배우기도 한다.


3. 새 틀 채택

교사(교육자)는 학생들에게 지식, 개념, 메타언어 같은 도구를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이때 학생들은 자신이 만든 이론을 더 깊고 넓은 담론 속에 참여시킨다.
이는 간접적인 경험의 확장이며, 가드너가 말한 '경험의 계속적 재구성'에 해당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수정된 이론을 최종적으로 채택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재구성하게 된다.


4. 통합과 적용

학교에서 습득한 지식으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이 만든 새로운 이론을 확정 짓는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이론으로 세상을 보며 활용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가치관이 생겨나기 시작되고, 생겨난 가치관은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렇듯 학교는 존재의 공사현장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어나가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공사장의 소음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내면의 공사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소중한 학생이라는 직업의 가치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학생을 '점수 수집가' 또는 '사회로 나가기 위한 등급표를 받는 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학생이 점점 '점수'와 '등급'에만 몰두하게 된다면 사유는 사라지고, 배움은 흐려질 것이며, 그만큼 존재의 재구성도 사려져 가게 될 것이다.


탐구영역 수능 등급컷. 학생의 배움은 수학능력시험에 의해 등급화 되지만, 진정한 배움의 가치는 이 숫자들에 담겨있지는 않다. / 이미지출처 : 진학사


배움이 없는 사회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몰락을 통해 이미 알아보았다. 배움이 없다면 자기 갱신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회 변혁의 에너지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배움의 존재'가 흐려지지 않도록 교육현장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과도 맞물려있으니 말이다.




학생이 배움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리고 학생이야 말로 배움이 키우는 삶이라는 주제에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 존재이다.

배움의 존재인 학생이야 말로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직업이 아닌가 싶다.
아니, 모든 생명은 배움을 통해 진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따지고 보면 학생이라는 직업이 생겨난 것은 자연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지식을 얻었는가, 그래서 점수는 몇 점이나 받았고, 나의 석차는 어느 정도 되는가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어떤 지식을 통해, 또는 어떤 이론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았고 스스로가 변화했다면,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고 숭고하다. 우리 사회가 학생에게 바라는 시선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어떤 성적을 거두었는지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성장하고 변화하여 인류의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은 단순히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존재를 배우는 존재’이며,

나아가 '배움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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