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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이유

기어이 살아내면 마주하는

by 안개별


한동안 둘째 생각을 갖지 못했다. 첫째에게 주던 사랑이 반으로 갈라질까 봐. 언제까지나 차고 넘치게 주고 싶은데 동생이 생기면 그걸 나눠줘야 할까 봐 그게 두려웠다. 몸이 힘든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부지런을 떨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인지라 이걸 나눠 써야 한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둘째를 낳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도 고심해야 했다. 사랑의 비중을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에 대한 막연한 고민이었다. 첫째와 쌓인 정도 있으니 6대 4가 좋겠다 싶다가도, 세상 밖으로 나와 의지할 곳이라곤 엄마밖에 없는 아이를 생각한다면 5대 5가 낫겠다 싶었다. 갈팡질팡 우왕좌왕 내 머릿속 혼란은 자꾸만 가중되어만 갔다. 결국 답을 내지 못한 채 첫째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병원에서의 3박 4일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명쾌하게 답을 냈더라도 그걸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그런 미련한 계획은 대체 왜 세웠던 거냐며 고민의 날들에 후회를 덧대었다. 아이 둘 육아는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뭐든 처음은 다 어려운 법이니까. 많이 힘들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 두 명의 마음을 모두 충족시켜 주기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았다. 내게는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이루지 못할 그저 욕심에 불과했다. 임신 기간 동안 아름답게만 그리던 육아의 환상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달아난 지 오래였다. 며칠이 지나자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그저 무탈한 하루를 기원했고 그렇게 매일을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시간은 화살과도 같이 빠르게 흘렀다. 순식간이었다. 또다시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몇 밤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시루 안에서 콩나물 자라듯 쑥쑥 커버렸다. 마음에 드는 옷도 꺼내 입고, 올곧게 양말도 신고,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들은 스스로 정리할 줄 아는 어린이로 기특하게도 자라 주었다.


둘째는 애교가 넘친다. 예쁨 받기 위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간혹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엄마, 아프니까 이거 붙여줄게요. 호오~."

살짝 긁혔을 뿐이었다. 발받침대를 딛고 깨금발로 대일밴드를 꺼내 와 엄마의 손등에 올리곤 손바닥으로 꾸욱 눌러준다.


"다 먹을 거예요. 엄마 음식이 최고거든요."

요리하는 엄마의 정성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요리도 다 잘 먹는다. 편식 없이 골고루, 맛있게 냠냠 소리 내서 먹는다.


"엄마, 여기 보세요. 내가 다 치웠어요. 깨끗하지요?"

청소기를 돌리는 엄마를 보자마자 하던 클레이 놀이를 멈춘다. 그리곤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들고 모두 제자리로 꽂고 넣는다.


"엄마랑 헤어질 생각하니 너무 슬퍼. 눈물이 날 것만 같아."

토요일 저녁부터 엄마가 없을 월요일 아침을 걱정한다. 엄마 없이 맞이하는 월요일은 유난히 슬픈 모양이다.


이토록 어여쁜 아이가 나에게로 왔다. 예고도 그 어떤 기척도 없이 홀연히 나를 찾아왔다. 천사가 날개를 숨긴 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실수로 기억을 잃어버린 걸지도. 이런 아이라면 세 명도 키울 수 있겠다는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그 옛날의 힘들었던 기억들이 아스라이 사라졌다. 고단했던 시간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잊혀져만 갔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이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숨 쉬는 까닭에 대해 늘 알고 싶었다. 화장실 벽에 걸린 휴지 한 장도 열 가지가 넘는 쓸모가 있는데. 그에 반해 나라는 사람은 어떠한가. 과연 얼마큼의 효용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을까. 매일 세끼 밥만 축내며 휴지 한 장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끊임없이 자문했다. 묻고 또 물었으나 언제고 돌아오는 대답엔 부정이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거라고. 분명한 답이 떠오를 때까지는 기어이 살아내겠다며 스스로를 단단하게 위로했다.


효용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고 싶었다. 아이 둘을 낳고서야 비로소 존재의 이유를 찾았다. 날개를 잃어버린 천사들을 먹이고 입히며 잘 키워내는 막중한 임무가 나에게 주어졌음을 깨달았다. 지금껏 겪었던 생의 굴곡들은 나를 테스트하기 위함이었다는 걸. 난도 높은 과제를 통해 적합한 인물임을 가늠하고자 했던 하늘의 뜻이었다는 걸 말이다.


아이를 키우며 매 순간 행복을 마주한다. 크고 작은 행복을 온몸으로 느끼는 매일이 즐겁다. 행복은 마치 선물과도 같아 불쑥, 빼꼼 고개를 내민다. 긴가민가하다. 잘 보이지가 않으니 찾아 나설 수밖에. 숨바꼭질하듯 술래가 되어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보일락 말락 한 오라기를 찾아낸다. 하나둘 주워다가 모아두면 타래가 만들어진다. 참을 수 없는 슬픔과 견디기 힘든 역경마저도 감내하게 만드는 행복 타래 말이다.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풀어 쓰며 썩 괜찮은 하루를 보낸다.



자그마한 소녀가 샐쭉한 표정으로 물었다.

"과연 있을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나직한 음성으로 고요하게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값진 일이 주어질 거야. 그건 너만이 해낼 수 있어. 그러니까 부디 견뎌. 절대로 너를 포기하지 마."

아리송한 얼굴. 잠시 뒤 소녀는 생그레 웃어 보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결 가든해졌다.

잔뜩 구겨지고 오그라든 마음이 한껏 펴졌다.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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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