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원한 냉기가 얼굴을 감쌌다. 차가운 걸 유독 싫어하지만, 여름만큼은 예외다.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들이 빠르게 사라져 갔다. 한여름엔 역시 에어컨이지.
여름은 한낮은 몹시 뜨거웠다. 나보다 앞서 약국에 들어선 유모차를 탄 아기와 엄마는 둘 다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엄마는 아기를 향해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고, 아기는 그런 엄마를 향해 방긋 웃어주고 있었다. 여름의 열기가 그들의 뜨거운 사랑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는 엄마를 보며 까르르까르르 웃어댔다. 엄마는 그런 아기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눈에서 하트빔을 계속 쏘아댔다. 그게 그들의 대화 방식일 터였다.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추는 아기 엄마를 보면서 몇 년 전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아기는 나를 향해 미소 지었고, 나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한 행복에 취해 있었다. 그래,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잠시 뒤, 자동문이 열리고 느릿느릿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더위에 지쳐 앉아 쉴 법도 한데, 할머니는 유모차 앞으로 가 섰다. 그리고는 아기를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기가 어쩜 이리 예쁠까. 엄마랑 아주 판박이네. 몇 개월이에요?"
할머니는 유모차 앞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아기 엄마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아기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나처럼 자식을 키우던 옛 생각이 났던 걸까, 아니면 손주 생각에 유독 반가워했던 걸까.
아기의 이름이 호명되었나 보다. 아기 엄마가 할머니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유모차를 끌고 카운터 앞으로 갔다. 그녀가 투약법에 대한 설명을 듣는 동안 할머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아기 엄마가 약값을 지불하고 돌아서는 순간 할머니가 다가와 물었다.
"아기 엄마, 혹시 애가 이거 먹나?"
할머니의 손에 들려있던 건 어린이 비타민. 상자에는 뽀로로가 그려져 있었다.
"아직 생후 6개월밖에 안 된 아기라서 못 먹어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기 엄마는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그렇구나. 예뻐서 뭐라도 사주고 싶었는데. 아가, 아프지 말고 잘 크거라. 엄마 말 잘 듣고."
세상은 바쁘게만 돌아간다. 그런 이유로 각박하고도 차갑기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바라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가끔 바라보는 하늘은 어찌나 높고 푸른지, 계절마다 꼭꼭 때맞춰 얼굴을 들이미는 꽃들은 얼마나 예쁜지, 퐁당 빠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맑고 투명한 아기의 눈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것들은 숨 고르고 천천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다. 눈앞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지 말이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또한 그러하다.
도착까지 한참이나 남았지만 임산부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모습, 지친 택배 기사에게 시원한 물 한 병을 건네는 모습, 길 가다 주운 지폐를 경찰서로 가져다주는 아이의 모습.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도 자신보다 먼저 다른 이의 마음을 살피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암만 세상이 메말랐다 해도 이토록 따스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있는 한, 우리네 삶은 아직 살만하다. 천천히, 세심하게 세상을 바라본다면 어느 한 곳 예쁜 구석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눈부시게 고운 마음들 말이다.
약국을 나서자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고 사람들은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약국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더위가 한층 기승을 부렸다. 그날의 열기는 계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다정한 한마디가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삶이란 어쩌면 그런 순간들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바쁘게 걷고 뛰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작지만 고운 마음들. 그 안에서 세상은 희미하지만 분명 빛나고 있었다.
가끔은 멈추어 주변을 둘러보자.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우리 곁에서 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