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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각자의 속도

by 안개별


오늘도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첫째 담임선생님의 메시지였다. 선생님은 '하이클래스'라는 앱을 통해 매일 알림장을 보내주신다. 오늘의 숙제, 내일의 준비물 등을 잊지 않고 챙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선생님의 다정한 배려다.
그날은 평소와는 달리, 공지사항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알림장 하단에 스케줄표가 첨부되어 있었다. 제목은 '녹색어머니 봉사 일정'. 노란색 조끼를 입은 채 초록색 깃발을 들고, 아이들의 안전한 등굣길을 책임지는 일이다.

첫째는 초등학교 3학년, 그러나 회사일이 바빠서 녹색어머니 활동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출퇴근이 자유로운 남편이 도맡아 했었기에 굳이 가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올해는 남편에게 사정이 생겼다. 왼쪽 다리 골절과 두 번의 수술로 오래 걷거나 서 있는 일을 하지 못한다. 결국 내가 남편 대신 아이의 학교 행사를 모두 챙기게 되었다. 조금 정신은 없었지만, 엄마의 적극적인 모습에. 아이가 무척이나 좋아했다.


녹색어머니 봉사 당일, 편의점에 들러 녹색 깃발을 들고 일정표에 있던 위치로 향했다.
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었다.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딱 한 번 켜졌을 뿐인데도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벌써 겨울이 오는 중인가보다. 조금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왔어야 했나.

세 번째 초록불이 겨졌다. 이제는 추위가 아니라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추위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외로움은 쉽게 무뎌지지 않았다. 무선 이어폰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오디오북이라도 들으면 낫겠다 싶었다.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셔 왔다.
앞으로 35분을 더 이곳에서 버텨야 한다. 긴 시간이다. 그래, 투덜대는 건 그만하자. 후회한들, 투덜댄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남은 시간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기로 했다. 그리고 표정을 통해 그들의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책을 볼 수 없으니,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로 했다.​

버스를 놓칠까 미간을 찌푸린 채 달려가는 젊은 남성. 손에 든 커피가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커피도 제 주인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모양새였다.
뒤를 이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작고 느린 발걸음에는 고민의 흔적이 느껴졌다.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누구를 만나볼까' 와 같은 설렘 말이다.
그리고 "지각이다!"를 외치며 가방 끈을 두 손으로 움켜쥔 아이가 뛰어왔다. 남성이 흘리고 간 서두름과 할아버지가 남긴 느긋함이 한데 뒤섞인 속도였다. 깜빡이는 초록불을 보던 아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자신의 템포로 여유있게 길을 건넜다. 마치 초록빛이 아이의 걸음을 넉넉히 기다려주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에게 밥 좀 빨리 먹으라며 재촉하던 이른 아침의 내가 떠올랐다. 미안함이 일렁였고, 속은 자꾸만 시려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줄 걸. 네 속도로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줄 걸.


서두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이의 속도가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내 속도에 맞추라며 끊임없이 등을 떠밀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아이는 천천히 가야하는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그 속도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기다려주지 못한 건 나였다. 미련하게도 비난의 화살을 내가 아니라 아이에게 돌렸다.

집에 가면 꼭 말해야겠다. 엄마가 미안했다고. 네 걸음을 엄마에게 맞추라며 재촉한 시간들에 참 미안하다고.
네 속도가 남들과 달라도 괜찮다고. 그러니 지금처럼 너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가라고. 엄마는 그런 네 옆에서 언제까지나 함께 걸어주겠다고.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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