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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by 안개별


우리 집엔 인사 인형이 살고 있다. 아주 작고 귀여운 녀석은 인사를 참 잘한다. 누군가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을, 헤어질 땐 아쉬운 마음을 전부 쏟아내며 사랑을 표현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에게 두 손을 배꼽에 모으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그럼 대부분의 어른들은 활짝 미소 지으며 칭찬을 두세 마디씩 건넨다. 어쩜 인사도 그리 예쁘게 하냐며, 잘생긴 얼굴만큼 큰 사람 될 거라며 말이다. 덕분에 아파트 단지 내에서 인사 잘하기로 이미 소문이 나있는 녀석이다.


출근하는 아빠에게 이미 수차례 인사를 건넸지만,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나 보다. 인사 인형은 현관까지 뛰어나가 다시금 아빠를 향해 사랑하는 마음을 내던진다.

"아빠, 사랑해요. 사고 나지 않게 운전하시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녀석의 외침은 계속된다. 문 너머 아빠에게까지 닿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한껏 높여 본다.


엄마의 퇴근길, 차량이 들어왔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무언가를 찾아 손에 쥐고 재빨리 현관으로 달려간다. 그날 유치원에서 그리거나 만들어 온 것들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은가 보다. 문이 열리자 인사 인형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의 엄마를 마주한다.

"엄마,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제가 만든 것 좀 보세요. 아주 잘했지요?"



우리 집 둘째의 이야기다. 반에서 제일 말이 늦게 트였고, 기저귀도 가장 늦게 뗀 아이다. 뭐든 빠른 구석이 하나 없었다.

남들 다 자기 자식 천재인 것 같다며 하나둘씩 자랑을 늘어놓을 때, 나는 조용히 입 꾹 다물고 있었다. 특별히 내세울 구석이 하나 없었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아이는 매우 건강하고 씩씩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발달지연이 의심된다며 병원에 다녀보라는 선생님의 권유도 있었다. 병원에서도 언어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병원을 무서워했다. 낯선 곳에서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결국 남편과 상의 후 치료를 다니는 대신, 더 많은 사랑을 쏟아붓기로 결심했다. 회사에 육아휴직계를 냈고, 1년간 아이와 최선을 다해 소통했다. 유튜브 등의 각종 매체들을 완전히 차단했고, 주기적으로 도서관을 다니며 독서량을 늘렸고, 옷이 온통 시커메질 때까지 자연 속에서 놀이했다.


그렇게 사랑을 가득 품고 자라난 아들은 올해 6살이 되었다. 자신의 마음을 제법 표현할 줄 아는 아이다. 다정한 말과 행동으로 감정을 전달하고, 상대의 표정과 말투로 마음을 읽고 공감을 보탤 줄도 안다. 그 시작은 인사였다.



나에게 인사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준 대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넸으나, 실상은 좀 달랐다. 인사는 그저 오가다 눈이 마주쳤으니 어색하지 않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진심을 담았던 적이 언제였더라. 그랬던 적이 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반면, 아이의 인사는 나와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그날의 상황과 심경이 담겨 있었다. 엄마가 몸이 안 좋은 날엔 위로를 담아 인사를 건넸고, 아빠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같은 말이었지만 매일 다른 감정들이 담겨 있었고, 그에 따라 표정이 바뀌었다. 아마도 마음의 온도가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인사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온 마음을 다하는 연습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순수한 인사 속에는 사랑을 미루지 않는 용기와 결심, 지금의 모든 순간을 품고자 하는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부터는 자꾸만 내일을 기약하게 된다. '다음에 해야지', '언젠가 하면 되겠지' 라며 미루고 미루다 정작 중요한 순간들을 흘려보낸다.

인사 인형은 그런 나를 불러 세워 속삭인다.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고. 주저하지 말고 당장 말하라고. 바로 지금이 마음을 전할 때라고. 지금 이 순간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고.


오늘도 아이는 현관 앞에서 사랑을 가득 담아 인사를 건넨다.

"아빠,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다니세요. 밥도 꼭꼭 챙겨 드세요. 그리고 사랑해요."



눈을 맞추고 인사하는 일,

마음을 담아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

탓하는 대신 서운한 감정을 전하는 일,

사랑한다는 말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일.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진심을 담아 사랑을 전해 본다.

"여보, 오늘도 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있어 항상 든든해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웃으며 돌아와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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