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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 배려

마음으로 하는 말과 행동

by 안개별 Jan 20. 2025


발달 지연이라고 했다. 영유아 검사를 했던 병원도, 발달 검사를 진행했던 아동 발달 센터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뭐든 빨랐고 잘했던 첫째와는 달리 둘째는 많이 늦었고 느렸다. 정작 당사자와 부모인 나와 남편은 괜찮았지만 주변의 우려가 상당했다. 아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과 왜 치료를 받지 않는 거냐며 엄마인 나비난하는 듯한 말들을 시도 때도 없이 받아내야 했다. 그들은 더 늦기 전에 병원을 다녀야 한다며 조언 섞인 따끔한 충고를 했지만 결국 난 기다리는 길을 택했다.


둘째는 4살 말 무렵 말문이 터졌다. 이어 5살이 되자마자 한글을 술술 읽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어휘를 활용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다. 육아휴직계를 내고 1년간 아이에게 몰두했고, 우린 매일 최대한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즐겁게 놀았다. 자주, 많은 시간을 자연과 함께 보내고자 거의 집 밖에 있었고, 집 안에서는 모든 활동을 함께 하고자 했다. 식사 차리기, 청소기 돌리기, 화분 물 주기, 빨래를 개는 일도 상호작용을 통해 함께 해 나가며 자기 효능감을 키울 수 있도록 시간을 보냈다. 모든 순간 우린 함께였다.


언제나 같은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오지만 피곤의 무게는 매일 달랐다. 모든 에너지를 업무에 쏟아부었던 그런 날이었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고 했다. 바닥이 난 체력 탓인지 아이들을 향한 미소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다정다감하던 말투 또한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저녁을 먹은 그들을 데리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마친 후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려주었다. 아이들을 먼저 내보내고 욕실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3~4분쯤 지났을 즈음 누군가 욕실 문을 컥 열었다. 반쯤 열어둔 문 사이로 들이민 뽀얗고 말간 둘째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얼른 나와 보세요. 내가 만든 거 보여 줄게요."


둘째가 요즘 들어 한참 빠져있는 유아용 블록으로 무언가를 만든 것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멋진 게 탄생했는지 엄마를 데려가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마치며 둘째는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변기 안을 솔로 문지르고 있는 나를 슬쩍 보더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일 다 하고 와서 봐 주세요. 근데 어... 천천히 와도 돼요. 알겠죠?"


알겠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둘째는 문을 닫고 욕실을 나갔다. 그리고 난 아이의 말을 곱씹으며 욕실 청소를 마무리했다. 자꾸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아이의 마음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그 말에 깃든 배려에 적잖게 감동해서.


빠르게 청소를 마무리하고 주방에 있는 친정 엄마에게 가 앞서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얘기했다. 그 말을 듣고 거실에서 놀던 둘째가 혀로 한쪽 볼을 깊이 찌른 채 쭈뼛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부끄러움이 몰려올 때 하는 둘째 특유의 행동이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아이를 있는 힘껏 꽉 끌어안아 주었다.


"우리 아가, 언제 이렇게 커 버렸어. 엄마가 바쁘니 보채지 않고 기다려 준 거야? 그런 예쁜 말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엄마 진심으로 감동받았잖아. 여기 봐. 엄마 울컥해서 눈물 난 거 보이지?"



천천히 와도 된다는
아이의 그 한마디.
그건 작지만 큰 배려였다.


말을 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을 걱정시키기도 했지만 아이의 마음은 절대로 늦게 성장하지 않았다는 걸 최근에서야 많이 느끼고 있다. 반에서 말문이 가장 늦게 트였고 여전히 "음..."과 "어..."를 섞어가며 쉽지 않은 의사소통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난 믿는다. 아이가 가진 따뜻한 마음이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를 흩뿌릴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영혼까지 탈탈 털린 기분이 드는 그런 날, 한 시간 반을 달려 집에 도착해 심히 노곤해진 몸으로 간신히 버티던 그런 날이었다. 그런 나에게 폭탄처럼 투하된 그 말이 선물과도 같이 폭죽이 되어 터져 버렸다. 그렇게 힘겹게 살아낸 하루를 보상받고, 다음 날을 다시금 힘차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얻었다. 매일 아이들을 통해 느끼고 배우며 성장하는 엄마로 살아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기에 이번 생은 꽤 성공적이라고 오늘도 어김없이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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