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들
선생님의 대답과는 다르게 첫째는 변함없이 노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왔다. 같이 퍼즐을 맞추었고, 함께 책을 보았으며, 번갈아 가며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노아는 말을 제법 잘하는 아이였고, 언제나 자신을 반겨 주었으며, 화를 낼 줄 모르는 배려심 넘치는 착한 친구라고 했다. 방긋 웃으며 좋았던 기억들을 풀어내는 첫째의 맑은 모습과는 달리 내 얼굴엔 먹구름이 서서히 드리우고 있었다. 이전에 없던 걱정과 불안이 점차 몸집을 키워 갔다. 설마 내 아이가 귀신을 보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난 대체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하는 거지. 차오르는 근심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늘어갔다.
봄비가 온 세상을 촉촉이 적시던 저녁이었다. 금요일 퇴근길, 꽉 막힌 도로를 달려 훈기 가득한 집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현관문 앞으로 강아지 마냥 헐레벌떡 뛰어오는 첫째가 보였다. 그녀가 몰고 온 따스한 공기와 향기가 내 콧속을 지나 심장에까지 가 닿았다. 유달리 쌀쌀하던 그날의 온도 탓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어깨와 마음이 활짝 펴지는 기분이었다. 첫째에게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물었더니 책에 있는 그림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내 손을 붙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정성스럽게 그린 그림을 가리켰다. 책상 위에 놓인 하얀 도화지에는 중절모 하나가 옆으로 길쭉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어린 왕자>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대답했다.
"우와. 멋진 모자를 그렸네!"
"엄마, 이거 아니야 모자."
"모자가 아니야? 그럼 뭘까."
첫째는 '엄만 절대 맞추지 못할 거야.'라는 확신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답을 말하고 싶어 죽겠는지 작은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엄만 도통 모르겠는 걸."
"이건 바로 뱀이야. 뱀이 코끼리를 삼켰어."
난 최대한으로 깜짝 놀란 척을 하며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눈으로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이거 봐. 뱀 눈이 여기 있잖아. 엄만 자세히 보지 않았구나?"
"그렇네. 엄마가 눈을 미처 보지 못했나 봐."
우린 서로를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아이가 따라 그리고 있던 책 <어린 왕자>를 밤새도록 다 읽어 내려갔다. 어린 왕자는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새로운 점을 발견하고 배울 수 있기에 평생 소장해야 하는 책이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바도, 꽂히는 문장도 매번 달랐다.
잘 보려면 마음으로 봐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책을 덮고 나니 문득 위 두 문장이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거든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책 속의 조종사가 어린 왕자를 만나 친구가 된 것처럼, 어쩌면 첫째도 자신만의 상상 속 친구를 만들어가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투명하지만 인간의 형태를 한 '노아'라는 친구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눈으로만 담아낼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왔기에 여태껏 만나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벌써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첫째는 여전히 노아를 만난다. 변함없이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아이라고 했다. 그동안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제법 가까워졌다. 종종 친구들이 왜 혼자 얘기하는 거냐고 묻기도 한다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매사에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높은 자존감으로 살아가는 그녀가 꽤 멋지다고 느껴졌다. 얼마 전에는 노아가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자신에게 소개도 해 주었다고 했다. 친구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참으로 기쁘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엄마인 나 또한 함께 기쁜 마음으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우와, 너무 부러운 걸. 혹시 노아 엄마는 없어? 엄마도 투명인간 친구 갖고 싶은데."
"엄마, 진짜야? 당연히 노아도 엄마 있지! 내가 꼭 소개해 달라고 할게. 노아가 엄청 좋아할 거야."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상상을 눈앞에 펼쳐두고 자유로이 스토리를 만들어가며 캐릭터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실로 대단해 보였다. 창작의 고통으로 이따금씩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고뇌하는 나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눈에 비치는 모습 말고 마음으로 아이를 보려고 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텍쥐페리가 조종사가 되어 세상 곳곳을 누비던 중 정말로 어린 왕자를 만났고, 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에 녹인 건 아닐까. <어린 왕자>는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기록과 상상일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