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가득한 대화가 오가는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더라도 마음의 평정을 쉬이 잃는 법이 없었고, 긍정 회로가 작동한 덕에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동시에 무엇을 하든 조급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그런 여유 덕분이었을까. 그들은 주변을 아우를 줄 알았기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 주는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 듯 보였다. 반면 나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언제나 시간에 쫓겨야 했고 완벽해지기 위한 강박에 시달렸다. 작은 실수 하나조차 용납할 수 없었기에 조금의 흐트러짐에도 견딜 수 없이 괴로워야 했다. 머리가 커 갈수록 스스로를 더욱더 단단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평생을 비혼주의자로 살았다. 사랑을 갈구할 줄만 알았던 나였기에 아낌없는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풀 자신이 없었다. 불행했던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보냈기에 내 자식들 또한 분명 그렇게 자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엄마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적잖게 확신했다. 내 삶의 비극을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줄 수는 없었기에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연하게 다짐했다. 그랬던 내가 남편을 만나 불같은 사랑을 했고 사랑에 눈이 멀어 버렸다. 아무것도 재고 따지지 않았던 이유로 첫 만남으로부터 10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고, 건강한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가 되었다.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이 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처음이었기에 많은 부분들에서 부족함을 느꼈다. 노력과는 다르게 공든 탑이 무너져 버리기도 했고, 의도와는 달리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인생을 살아 본 적도 없으면서 아이들에게 허황된 꿈과 기대를 심어주는 스스로의 모습에 특별히 다를 것 없던 평범했던 어느 날, 자괴감이 물밀듯 몰려왔다. 살면서 계획대로, 원하던 대로 인생이 흘러갔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그저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도록, 바람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도록 두기로 했다. 대신 딱 하나, 내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에 혼신의 힘을 다하기로 했다. 그건 바로 칭찬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돌이켜 떠올려 보자면 난 장점을 볼 줄 아는 능력이 탁월했다. 여럿이서 같은 걸 보더라도 좋은 모습을 먼저 볼 줄 알았고, 장점을 많이 찾을 줄 알았다. 짝꿍의 좋은 면을 찾는 시간만 되면 정해진 시간 내 가장 많은 장점을 찾는 그런 아이였다. 그런 내가 아이 둘을 먹이고 입히고 키우며 얼마나 많은 칭찬과 격려를 쏟아낼 수 있었겠는가. 지인들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과하다'는 피드백이 들려왔다. 그것은 나만의 육아관이었기에 그런 말을 듣는 게 썩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되려 좋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목표한 대로 그 방향으로 잘 나아가고 있다며 나를 독려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우와, 이걸 혼자서 그려 봤어요? 어쩜 색상을 이렇게 잘도 골랐을까. 바나나는 노란색인데 파란색 바나나를 그렸구나. 우리 승기는 참 창의적이기도 하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색칠도 정말 잘했다! 다음엔 또 무얼 그려 볼 거야? 너무 기대가 되는 걸."
초등학교 1학년, 8살이었던 첫째가 4살짜리 동생에게 건네는 칭찬의 말이었다. 내 두 귀를 의심했다. 처음에는 쟤가 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다음으로는 첫째가 둘째에게 책을 읽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안방 정리를 마치고 나와 본 거실의 광경은 이러했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동생과 그의 그림을 번갈아 보며 동생의 작은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하고 있는 첫째는 분명 둘째를 칭찬하고 있었다. 비교적 구체적이었고 과하다 싶은 텐션과 내용의 칭찬이었다. 내가 첫째에게 하던 칭찬과 그 모습이 꼭 닮아 있었다. 더 재미있는 건 이러한 칭찬의 기술이 날로 늘어간다는 점이다. 동생에게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했던 칭찬의 말들을 머릿속에 담아 와서는 하나둘씩 풀어내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 기술이 아이에게 큰 강점이자 평생의 자산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기쁠 따름이다.
자식에게 사랑을 나눠 주지 못할까 봐 그게 두려워서 결혼이 하기 싫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내가 남편에게 크나큰 사랑을 받고 이를 다시 돌려주며 사랑의 나눔을 연습할 수 있었다. 난 얼마나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 살아왔던 걸까.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사랑의 나눔은 하면 할수록 곱절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술은 날로 발전하여 곱절 이상의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보통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인다. 칭찬에도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통한다. 사랑도 칭찬도 그렇다.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만큼 아이도 다른 누군가에게 제법 근사한 칭찬과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우리네 인생은 그리 길지가 않다.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시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정해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더 많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좋은 모습을 보기 위한 노력을 다해 보는 건 어떨까. 칭찬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보이는 것, 느끼는 것, 들리는 것에 내가 가진 가장 예쁜 마음을 더한 한마디를 건넨다면 그게 바로 위대한 칭찬의 시작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