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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육토피아 03화

지켜야 할 규칙

좋은 거울이 되어야 하는 이유

by 안개별


두 뺨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날카롭게 느껴지기 시작한 초가을의 늦은 밤이었다. 언제나처럼 퇴근 후 비번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고 강아지마냥 헐레벌떡 뛰어오는 아이들이 보였다. 하루 중 내가 가장 행복해지는 시간이다. 각자의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다시 만나는 그 순간에는 말로는 다하지 못할 가슴 찡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매일 경험하는 노멀하고 루틴한 일상이었지만 그 시간을 또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에 단 한순간도 감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만큼 우리의 재회는 짜릿했고 감격스러웠으며 한없이 소중하기만 했다.


저녁을 다 먹은 첫째에게 언제나처럼 소소한 질문을 던졌다. 아이들의 하루는 어떠했는지 궁금한 이유에서였고, 그 질문은 매일 가볍게 시작하는 대화의 주제이기도 했다.


"나나야, 오늘 학교 생활은 어땠어?"

"엄마, OO가 나랑 친구 하기 싫댔어."

"설마 절교하자는 뜻으로 그런 건 아니지?"

"응. 그거 맞아."

"정말? 왜 그런 말을... 나나 기분은 어땠어?"

"좋지는 않았어."


그런 말을 들어야 했던 이유야 물론 있었겠지만 그 말이 주는 상처는 분명 남아있을 것이었다. 나보다 더 속상했을 아이를 위로하는 게 먼저였기에 이성의 끈을 꽉 잡은 채 대화를 이어갔다.


"많이 속상했겠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그랬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나도 너랑 친구 하기 싫거든.' 그러지 그랬어."


힘껏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누군가 가위로 뎅강 잘라버린 것 같았다. 참았어야 했고 내뱉지 않았어야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고야 말았다. 당시의 상황에 과몰입한 탓이었다.


"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당시에는 미처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는 듯 보였다.


"학교에서는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 게 있어."


대화의 화제가 갑작스럽게 전환되었다. 첫째는 새삼스럽게 '규칙'을 논하고 싶었던 걸까.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무슨 규칙이 있는데?"

"친구가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쁠 말은 하지 않는 것, 그게 우리 반 규칙이야."


누군가 나의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내리친 듯 머리가 어질 했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부끄러움이 폭풍처럼 몰려와 얼굴이 화끈거렸다.


"엄마가 그랬잖아. 듣기 싫은 말은 받지 않으면 된다고. 그래서 나 그 말을 받지 않았으니 다시 돌려준 셈이야. 그리고 어차피 OO는 금세 풀려. 아마 내일이면 아침부터 같이 놀자고 먼저 말을 걸어올 거야."


그녀의 깊은 생각과 논리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보고, 듣고, 배웠던 것들을 쉽게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랬기에 처음 겪는 당황스러운 상황에도 제법 어른스럽게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부쩍 커 버린 아이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내가 받았던 감동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고 포근하게 두 팔 벌려 첫째를 안았다. 아이는 '엄마가 안아 주니까 좋아.'라고 말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벌써 사십여 년 가까이를 살아왔지만 규칙을 언제나 지키지는 못했다. 나에게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규칙은 왕왕 깨어지곤 했다. 교실과 복도에 뛰어다니지 않기,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에 집중하기, 매일의 숙제 잘하기, 수업 준비물 잊지 않고 챙겨 오기 등 다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법칙인 규칙을 지키지 않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했다. 인간으로서 저질렀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일을 범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이익만을 좇기 위해 다른 사람의 피눈물은 뒷전으로 두는 이기심 가득한 사람들도, 끊임없이 상대를 괴롭히고 속박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드는 사람들 모두가 이에 해당했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이전처럼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기에 애석하게도 우린 그들과 함께 숨 쉬며 같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규칙을 지켜가는 세상이 온다면, 전 인류의 행복도 더불어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기본적인 안전과 보안이 보장되는 사회 속에서 개인과 기업에게는 성장과 도약을 위한 발판이 제대로 마련이 될 것이고,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하는 데 있어 좋은 기반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나 또한 학교의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주변인들로 인해 귀중한 시간과 감정을 꽤 오랫동안 소비해야 했었기에 당연하게도 모두가 규칙을 지켜내는 그런 세상에서 다시금 그 시간들을 살아내고픈 소망이 있다. 눈을 감고 잠시동안 나만의 유토피아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고 그곳에 소녀 시절의 나를 데려다 놓았다. 현실에서의 내 경험과는 다르게 함박웃음을 가득 머금고 친구들 사이에서 히죽거리는 내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더없이 행복해 보였고 미래를 꿈꾸며 목표한 것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고 했다.

미래를 책임지고 나라와 세계를 이끌어 갈 우리의 아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어야 한다. 어른들의 의식하지 않은 행동마저도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모방할 것이고, 체득할 것이고, 습관처럼 그 행동들이 튀어나올 것이기에 규칙을 가르치고 주입하기 전에 좋은 거울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꿈나무들과 먼 훗날 이 지구상에서 숨 쉬고 살아갈 후손들에게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자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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