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자
그저 바다 위에 떠 있는 돛단배 마냥 바람이 불면 나아갔고, 해가 뜨면 잠시 쉬어갔고, 폭풍이 불면 거친 파도를 고스란히 다 받아 냈다. 피할 수도 있었고, 이겨내고자 노력할 수도 있었고,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별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못했다. 지독하게도 홀로 견뎌내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했고 또 해야 했다. 오랫동안 꽁꽁 감춰왔던 상처를 다른 누군가에게 들켜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나에게로 향하는 편견과 선입관을 이겨내고 극복해 갈 용기가 없었기에 그래야 했다. 그런 이유로 내 감정이 어떠한 상태인지 알지 못했고 생채기가 잔뜩 나버린 감정들을 어루만질 줄 몰랐다. 기쁘면 적당히 웃었고, 슬프면 몰래 울었고, 화가 나면 그냥 꾹 참았다. 올바른 성장의 길을 걸어오지 못했던 난 어설픈 어른이 되어버렸다.
힘든 일은 왜 쉬이 지나가는 법이 없을까 싶은 겨울이었다. 악재에 악재가 더해져 이승의 끊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날이 선 예민함은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밑바닥이 어디인지를 여실히도 보여주었다. 어설픈 어른이었던 난 유해한 엄마가 되어버렸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고 눈물 가득한 후회로 매을 밤을 적셔야 했다. 그날 역시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다.
"넌 왜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하니! 어째서 자꾸 엄마 말을 안 듣는 거야!"
날카롭고 뾰족한 말들이 첫째 아이의 심장에 쿡쿡 박혀버렸다. 쓰라린 마음은 제법 굵은 방울을 만들었고 그 방울은 위에서 아래로 하염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엄마, 안아줘."
잘못한 것에 대한 꾸중을 듣던 첫째의 입에서 안아 달라는 말이 애잔하게 흘러나왔다. 아이가 잘못한 것을 이해시키는 일을 차마 다 끝내지 못했기에 아이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친 채 잔소리를 이어 나갔다.
"대체 언제쯤 말을 들을 거니? 실수가 반복되면 잘못이라고 했어, 안 했어?"
잘못은 자꾸만 몸집이 커져만 갔다. 하나의 잘못으로 시작된 잡도리는 과거의 실수까지 모두 소환하기 시작했다. 더는 견디기 어려워진 첫째가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엄마, 제발 안아줘."
눈과 귀가 벌게져서는 양팔을 넓게 벌리고 다시금 안아달라는 말을 내뱉는 첫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잠시 멈춰 버렸다. 이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아이를 품에 안았다. 간절한 그녀의 바람이 맹렬하게 질주하던 나를 멈춰 세웠다.
"엄마가 안아주니까 좋아. 계속 안아줘."
내 품에 푹 안긴 채 웅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와 버렸다. 다 큰 아이라고 생각해서 꾸짖고 혼도 내곤 했건만 여전히 엄마 품이 좋은 마냥 좋은 어린이였다니. 어리고 어린 이 아이를 붙들고 그 긴 시간 동안 대체 난 무슨 짓을 한 거지.
"엄마...? 웃었다!"
내 품에 파묻혀 있던 아이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옅은 내 웃음소리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아이는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나와 눈을 마주했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깔깔거리며 자지러지게 웃어 버렸다. 그렇게 '안아줘.' 그 한마디는 엄마의 화를 잠재우는 주문이 되어버렸다. 언제 어디서고 꺼내 쓸 수 있는 마법의 주문 말이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슬기롭게 상황을 대처하고 시련을 이겨낸 첫째를 보며 지난날들을 후회했고 반성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주문은 마법처럼 내 분노를 조절해 주었고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는 확실한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은 몰랐지만 부끄러움은 느낄 줄 아는 인간이었기에 몰려온 자괴감에 꽤 오랫동안 괴로워해야 했다. 최선의 엄마가 되어 주자던 다짐은 저 멀리로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목표를 다시 세웠다. 그건 바로 아이들에게 무해한 엄마가 되는 것, 적어도 아이들에게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 엄마는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가슴속 깊이 박힌 채 자라난 화, 분노, 노여움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몸 밖으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올바른 방법으로 곧잘 표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생각보다 쉽지가 않은 작업이다. 일단 터져버린 화는 걷잡을 수 없이 더 커져버리기도 하는 이유로 빠른 진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때는 일단 잠시 멈추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이후 편안한 상태로 숨을 고르다 보면 호흡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여 뇌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있다. 필자의 상황처럼 웃음으로 더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가시 돋친 말과 눈빛으로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는 일을 사전에 차단할 수가 있을 것이다.
화가 난다면 이를 가벼이 여기지 말고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자.
그리고 자신만의 주문을 외쳐 보자.
스스로에게 되네어도 좋고, 아이에게 부탁을 해도 좋다. 마법의 주문은 분명 그대를 육토피아로 안내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