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근무 : 자폐아 이해하기
"자폐아인데, 잘 부탁해요."
첫 만남에서 장애인공단 담당선생님이 말씀하신 첫마디다.
뭔지 모르겠는데 그 말속에는 '더 어려울 수 있어요'라는 뉘앙스와 미안함이 들어있었다.
당시 자폐아에 대한 나의 이해는 네이버 지식백과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재는 '자폐스펙트럼장애'라는 용어로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의사소통능력과
사회적 상호작용에 어려움이 있으며 강박적인 행동이나 고집스러운 모습이 있고 청소년 시기에는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고 쓰여있다.
당시 나에게는 네이버 백과 수준의 이해와 영화 <레인맨> 속의 숫자를 모조리 외울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을 가진 레이먼드처럼 서번트증후군이 있는 한쪽 방향의 지적 수준이 뛰어난 천재 같은 아이들도 있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대학교 때 그런 아이를 만났었다.
영화와 현실에서.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대학생 때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미국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House of Cards (1993) — 한국어 제목: 집으로 가는 길(감독: Michael Lessac)
주연: Kathleen Turner, Tommy Lee Jones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편(아버지)을 잃은 후 어린 딸이 충격으로 인해 자폐적 반응(Autistic-like behavior)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딸의 변화에 혼란스러워하고, 딸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든 비밀스러운 "카드의 집(집짓기)" 속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려 하자, 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과정을 다룬 드라마다.
자폐 아동에 대한 본격적인 묘사라기보다는, 트라우마 이후의 심리적 반응을 자폐와 유사하게 그린 영화로 모녀 관계와 치유 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챗GPT참조)
자폐아성 장애를 가진 어린 소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의 집에서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살던 그 소녀를 이해하려 따라가다 엄마가 소녀의 세상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소통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왠지, 그날 펑펑 울었다.
소녀의 세상이 나의 세상과 다르지 않아서 그렇게 내가 살아가는 것 같아서...
영화를 본 후 세상으로 조금 더 나가보자고 용기를 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친구의 친척집에서 만난 아이. 그때 알았다. 자폐아구나. 그런데 그 친구도, 친척의 부모님도 몰랐다. 자신의 아이가 자폐아라는 것을. 말해줄 수가 없었다. 단지 언어가 늦다고만 말했다. 그게 아닌데... 자폐아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이라 그 무엇도 말해줄 수가 없었다. 단지 옆에서 노는 것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선생님.○○복지관인데요. 근무하실 곳이 아름다운 가게 ○○지점이에요.
시간은 11시부터 3시까지이고요.
취업할 것은 아니고 직업훈련만 받을 거예요. 근무가능하시겠어요?"
"네. 언제부터요?"
그렇게 첫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같이 일할 훈련생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갖고 있지 못한 채 단순히 이름, 전화번호만 가지고 아름다운 가게 ○○지점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장애인직무지도원 ○○○이라고 해요. 여기서 기다리면 될까요?"
"아. 선생님이시구나. 아직 학생이 오지 않아서 기다리고 계셔요."
그렇게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자니 키가 산만한 여자아이가 들어섰다. 뒤에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장애인관리공단에서 나오셨다고 했다.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 이 아이가 자폐아라 대화가 잘 되지 않아요. 담당학교선생님께서 간략하게 성격 등을 적어주셨어요. 보시고 궁금하신 점이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저에게 연락하시든지 학교선생님께 상의해 주시고, 부모님 전화번호도 여기 있어요."
그렇게 학생을 맡겨두고 가셨다.
"김다나(가명)씨,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제가 훈련을 맡게 될 직무지도선생님이에요"
다나 씨는 대답 대신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흩어지는 그 말속 어디쯤에 '네'라는 대답이 환청처럼 들렸다.
혼잣말을 하든 안 하든 훈련생에게 일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고3인 다나 씨는 조만간 졸업 후 일을 구해야 된다. 그러니 취업훈련답게 사소한 것도 알려줘야 된다. 첫 근무라 긴장도 했고 나름의 사명감만 넘쳐흘렀다. 한편으론 큰 탈 없이 일이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오늘은 첫날이니 힘들지 않을 정도로만 일해보아요. 여기 나 따라서 똑같이 옷에다 도난방지택을 붙여요."
열심히 설명하고 방지택을 붙여 보인다.
과연 할 수 있을까.
혼잣말을 하는 와중에도 방지택 붙이는 법을 잘 보았나 보다. 곧잘 따라 한다.
매니저님이 청소와 매장 진열을 부탁하셨다. 청소하는 법과 매장에서 옷을 진열하는 법, 소품을 진열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혼자만의 생각에만 빠져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계속 종알종알 혼잣말을 하면서도 제법 잘 청소하고 매장진열을 따라 하고 있었다. 첫날은 그렇게 큰 무리 없이 장애인활동선생님(출퇴근담당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일을 했다.
그렇게 다나 씨와 일하면서 서서히 자폐아에 대해 알게 되었다.
혹시 돌발행위를 하면 어쩌지?
잘 집중도 못하고 혼잣말만 계속하는데 일은 잘 따라 할 수 있으려나?
그런데 그것은 나의 편견일 뿐이었다.
다나 씨는 내가 직접 일하는 모습을 시범으로 보이고 따라 하라고 하면 곧잘 잘 따라 했다.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는 와중에도 나를 의식하고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쉬면 같이 쉬고, 내가 일하면 같이 일하고 큰 문제없이 따라와 주었다.
그러나 휴게시간에는 얼굴을 가만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쥐어뜯거나 불안해했다. 쉬라고 하면 거울만 보고 얼굴을 죄다 꼬집고 뜯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매니저님께 힘들지 않을 사소한 일이라도 달라고 했다. 기부용지에서 이름이나 중요한 부분을 써야 되는 부분에 형광펜을 칠하는 연습을 했다.
어느 날은 화장실을 한 번도 가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 때가 됐는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돌이켜보니 화장실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혹시 급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말을 못 한 것일까 걱정이 돼서
"화장실 안 가고 싶어요? 갈래요?"
"네 에에에"
그동안도 가고 싶었을 텐데 말을 못 했던 것이다. 내가 먼저 챙겨줘야 됐었는데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다나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점심이 돼서 김밥을 사러 같이 가면 진짜 어린아이가 되어 매우 신나 했다. 너무 신난 나머지 찻길 주변을 살피지 않고 뛰어가서 나는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오늘은 다나 씨가 주문을 해보자. 여기 종이에 적어왔지? 사장님께 인사하고 그 종이를 드려봐."
처음에는 인사도 어렸웠지만 어느 순간 간단하게 인사도 하고 종이도 직접 드렸다.
어느 날은 은행에도 갔는데 그게 좋았는지 팔짝팔짝 뛰어가려 해서 급하게 손을 꼭 붙잡고 걸어갔다.
"다나 씨. 오늘은 은행에 가서 잔돈도 바꿔볼 거야. 여기 종이를 드리고 말을 한번 해볼래?"
"네."
다행히 시간이 흐르자 짤막하게나마 대답을 했다. 어느 순간부턴 자신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일은
'나 못해. 싫어. 안 해'라고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열흘이 지난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보러 오셨다. 그날 처음으로 활짝 웃으면서 울먹이는 다나 씨의 얼굴을 보았다.
"선생님. 보고 시퍼쩌"
"힘들어쩌, 근데 재밌쩌"
그 말 외에 더 이상의 말은 안 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얼굴에 미안함이 들었다.
힘들었구나. 일한다고. 나름 긴장하고 어려웠구나.
긴장했을 때, 쉬는 시간이었을 때 다나 씨는 얼굴에 난 작은 뾰루지를 쉼 없이 쥐어뜯었다.
기분 좋을 때는 짱구만화의 짱구가 되어 일본어로 대사를 줄줄 읊었다.
그날은 쥐어뜯지도 짱구도 되지 않고 직접 눈을 맞대고 말을 하고 환하게 웃으며 살짝 눈물을 지었다.
저 정도까지는 대화가 가능했었구나.
짐짓 '여기까지 인가 보오'라고 내가 먼저 나름의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았다.
"직무지도를 잘해주셔서 고마워요. 자폐아인 경우 직무지도 선생님들이 어려워하시는 경우가 많아서요"
3주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방문하신 공단선생님의 말이었다.
대화는 잘 되지 않았지만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다. 대화가 되지 않으니 그저 행동으로 무엇을 해야 되는지 보여주었고, 재촉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다나 씨는 착했다. 답답하거나 불안하거나 일을 못하겠으면 얼굴을 쥐어뜯든, '못해'라고 말을 하든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해주었고, 대부분은 열심히 같이 일을 따라서 해주었다. 화를 내거나 돌발행동은 하지 않아서 나는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름다운 가게 점장님이 우리를 재촉하지 않았다. 사업체의 역할도 컸다.
성격 급한 내가 재촉하지 않았던 이유는,
전에 아름다운 가게에서 만났던 하나 씨(가명)의 직무지도선생님 덕분이었다.
3달 정도 보면서 저절로 배웠던 것 같다.
처음에 직무지도 선생님을 보고 속으로 '선생님도 느려, 와, 애도 느린데 선생님은 더 느려.' '와, 뭐 저렇게 조곤조곤 얘기해. 답답해. 답답해' 이랬었는데 그게 옳았다는 것을 하나 씨 담당선생님의 직무지도가 끝날 때가 돼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자폐아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의사소통을 언어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것처럼.
그들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된 것이다. 그 소녀처럼.
사진:일산호수공원에서(직접 촬영)
♡친구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썼습니다.
♡사업체는 첫 근무지 외에는 ○○로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