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의 지난한 노력 끝에 드디어 마라톤에 참여!
재차 말했든 운동치였다.
100m 달리기는 빨라야 25초.
챗gpt에게 물어보니 못 뛰는 것 맞다고.하하.
체육시간만 되면 빨리 못 뛰어서 벌을 섰다.
"저기 봉까지 빨리 달려오는 사람은 제외야.3명까지!"
생활체육은 없었다. 그저 경쟁만 있었고 늘 낙오자였다.
어린시절 여자아이들의 그 흔한 고무줄놀이도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가끔 남자아이들처럼 차라리 고무줄을 잘라버리고 도망치는 것이 더 멋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소심하고 또래 여자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나는 어떻게든 어울렸다.
발목에 고무줄을 걸고 "월화수목금토일~~"
깡총깡총 잘 넘기면 우리 팀 WIN!
어쩔.
나 들어가면 우리팀은 무조건 Game over! 발목까지 괜찮은데 무릎, 허벅지, 허리, 가슴, 팔 올리면 응! 안돼.안돼!
무릎에서 이미 죽어.
다행히도 내가 나름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친화력이 있었나보다. 깍두기였다.
원래 깍두기도 한쪽편에만 붙는건데
하도 빨리 죽어서 A팀, B팀 할 것 없이 양쪽 다 붙었다. 그래서 나의 죽음은 팀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름 열심히 고무줄을 했지만 결국 발목을 넘기지 못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이젠 고무줄은 없고 오징어게임이랑 돈까스 게임이 나오네.
젠장.한발로 깡총깡총!
깡!에서 Game Over!
역시! 어느 팀의 간택도 받을 수가 없었다.
왕따의 경험도 있었지만 진짜 친화력 짱이었나봐.
어느 팀도 아니지만 모두의 팀이 될 수 있었다. 다시 깍두기가 됐다!
그러나 늘 아쉬웠다.
나의 죽음은 여전히 어느 팀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아 욕을 먹을 일도 없었지만 매일 깡!만 하는 슬픔이란...
중학교 졸업이 다가온 어느날 깡!총! 성공!
그리고 그날, 아이들의 유치한 놀이들이 끝났다. 텅 빈 운동장에 나홀로 서있다.
왠지모를 슬픔이 있었다.
매일 중간에 도시락 까먹고 피나게 노력했지만
깡!에서 끝나는 인생!
고등학생이 되니 상황이 달라졌다.
쉬는 시간들의 유치한 게임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점수만 매기는 체육만이 남았다.
운동치가 뭐 죄인인가요?
종국엔 체육시간에 "아, 어지러워~~"하고 양호실 가는 쌤들의 보호를 받는 연약한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친구들은 연약해서가 아니라 엄마들의 든든한 빽으로 쉬는 거였다.
양호실도 못가고 달리기는 꼴등!
체육점수는 엉망!
체육쌤에겐 맨날 욕 바가지로 먹고...
나도 잘 달리고 다 잘하고 싶은데요.
못해도! 즐길 수는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뭐라도 하겠다고 발버둥치던 어느날 뜀뛰기를 하는데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새가 날아다녔다. 그러다 세상이 까맣게 되면서 뱅글뱅글. 쿵 소리가 들렸다.
집이였다.
자꾸 눈을 뜨란다.
자고 싶은데...
쓰러진 거였다. 젠장.
눈 뜨니 운동장.
그렇게 생활 속 운동은 멀리 사라져갔다.
그래도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더이상 자신이 없었다.
세상도 바뀌어 깍두기는 사라졌다.
깍두기라는 단어를 알기는 할까?
그렇게 살다가 몸은 안 좋은데 자꾸 산이 불렀다.
산을 가본 적이 없어서 산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산이 그리웠다. 그곳에 가면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 천리안 문학동호회 활동을 했었는데 한 회원이 자기는 산을 다닌다고 했다.
그 회원의 집도 놀러 갈 정도로 나름 친해져서
내가 같이 가면 안되겠냐고 묻자.
"그러든지.그런데 우리는 인왕산 정상에서 만나. 가능하겠니!"
아, 나 그동안 무시당했구나.
동호회를 탈퇴했다.
죽어도 산을 가야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렇게 산악동호회에 가입을 했다.
걷는 거라 괜찮았다. 여기서는 다들 괜찮다고 했다. 맨날 미끄러져 넘어져도 괜찮다고.
등산 도중 맨 처음 미끄러지는 사람이 막걸리 쏘기야! 올라가자마자 첫 타자로 쭉쭉 잘도 미끄러졌다. 하물며 나르기도 했다. 다행히 막걸리를 쏘지 않아도 됐다. 괜찮다고 했다.
지금 다니는 크로스핏 박스에 왔을 때도 그랬다.
용 코치님 왈 "이 정도면 유연하고..."
범 코치님은 "저. 이거 못해요"라고 말하면
"try해야죠", "흐잉~~~"
영 코치님은 바벨을 못 들면
"플라스틱봉으로 하면 되죠"
수코치님은 "에잇, 더이상 싯업 안돼요!"
무코치님은 그저 밝게 맞아 주신다.
형코치님은 늘 기본자세를 잡아주고 또 살폈다.
희코치님은 "암요. 제가 또 잘 맞춰드리죠"
천코치님은 당황해서 어떻게 코치할지 일기까지 썼다고 한다.하하.
그렇게 모든 코치님들이 알맞게 동작을 바꾸어주며 '할 수 있다'고 늘 말해주었다.
준코치님은
올해(2025년) 무엇을 이루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마라톤이요. 일단 5km 해보고,
그런데10km도 뛸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요.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어요."
뛰는 것은 줄넘기보다 더 어려웠다.
어느날은 줄여줘도 힘들어서 코치님 몰래 쉬다 들어왔다. 워밍업으로 박스 10번 뛰는 것은 늘 고통이고 민망이였다.
그런데 작년에 늘 반갑게 인사하는 뤼님과 더덕님의 인스타를 봤다. 안동마라톤을 보는데 오래만의 설렘, 가슴이 뛰었다. 나도 뛰고 싶었다. 언젠가는 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리고 크로스핏 2년이 다가오던 2025년, 여성마라톤 대회 참여신청을 하고 주1회씩 5km를 뛰었다. 박스에서는 오후에 일찍 와서 10바퀴씩 뛰었다.
대회 당일 오전에 비가 왔다.
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5km를 완주할 수 있을까?
그날 시원하게 뛰었다. 오히려 아쉬웠다.
나 이제 모든 가능한거야?
10km도 욕심이 났다.
오전 친구들이랑 마블런을 참여해보자고.
짬짬이 연습을 했다.
5km까지 급수대가 없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5km지점에 급수대가 있었고
8km까지 어떻게든 뛰었다.
마지막 2km는 거의 걷다 뛰다를 반복하며
'1시간 30분안에 못 들어가도
뛴다는 것이 어디야. 난 할 수 있어!'
결국에 1:25:43초라는 기록으로 들어왔다.
내 목표는 1시간 20분이었는데
아침부터 너무 기다리다 지쳐서 간신히 들어왔지만 뿌듯했다.
크로스핏이 아니였다면 시도도 못했을 마라톤!
크로스핏을 만나면서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났다.
그랬다. 아파서 책만 읽던 아이에겐 세상은 답답했다. 그래서 죽더라도 마지막까지 뭔가를 하고 싶었던 그런 아이. 그게 나였다.
난 이제 또 무엇을 할지 꿈꾼다.
그리고 안다. 이생망이라 더 꿈꾸지 않으면
어느 순간 다시 숨도 쉬고 싶지않을 만큼 얼마나 무기력해질지.
그래서 오늘도 생존을 위해 박스에 가고
꿈꾸기 위해, 나를 찾기 위해 간다.
왜이렇게까지 하는건데 말하면서.
누구는 RUN은 가장 쉬운 운동이라 하지만
막상 살이 15kg 이상 찌고 나이가 먹으니
뛰는 것이 문제가 아니였다.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마라톤?
이제 나 뭐든 할 수 있는 거네!
시도해보며 되지.
못하면 뭐 어때.
즐기는게 중요하지.
크로스핏은 그래서 나에게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당신도 할 수 있어요, 우리 같이 운동해요!"
그래서 좋다. 크로스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