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앉아봐. 얘기 좀 하게"
남자들은 아내의 이 말을 가장 두려워한다지.
남편도 그럴까?
리모컨을 잡고 누우려고 각을 잡던 남편이 잠깐 멈칫하더니 식탁에 와 앉았다.
나를 마주 보지 않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앉아서 내 시선을 피했다.
"나 이렇게는 못살겠어. 옆집 아저씨라고 해도 당신처럼 그러지는 않을 거야.
돈 벌어서 혼자 다 쓰고 노름까지 하면서 집에 와서 이렇게 권리만 챙기는 거 민폐 아냐?"
나의 이런 말에 남편은 항상 미안하다거나 앞으로 잘한다는 식의 공수표를 날리는 것이 다반사인데 이번엔 달랐다.
"이혼해 그럼"
남편은 겁쟁이다.
혹시라도 내가 이혼하자고 할까 봐 노심초사했었고, 딱 한번 이혼하자고 하니까 잠수를 탔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입에서 먼저 이혼 이야기가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별거는 해도 이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남편 앞에서 다짐했다.
한번 뱉어낸 말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나를 아는 남편에게는 싸움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인 무기였다.
그러나 그 말에 함정이 있다는 걸 모르다니.
남자들은 참 단순해.
"내가 이혼 안 한다고 하니까 겁 없이 요구하네.
이혼은 생각해 볼 테니까 지금은 집에서 좀 나가줘."
예상 밖의 대답이었는지 살짝 당황하는 표정이 스쳤다.
그러고는 남편 특유의 '미루기 전술'을 시전 하기 시작했다.
"나갈 테니까 집 얻어줘."
겨우 생각해 낸 답이라니,,, 말하고 자기 스스로 민망하지 않았을까.
"나한테 돈 맡겼어? 벌어서 혼자 다 쓰고 왜 나한테 집을 얻어 달래?"
난 평소처럼 목소리 높여 싸우지 않고 매우 차분하고 감정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럼 보증금 마련할 때까지 시간을 줘"
남편과 합의하에 3개월 후에 집을 떠나겠다는 결론을 냈다.
남편은 3개월이면 유야무야 대충 화해가 될 것이고, 그럼 이번 일은 없었던 일이 될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게 30년을 넘게 살아왔으니까.
나는 달랐다.
그동안 남편과 헤어지지 못한 이유는 결손가정을 만들고 싶지 않은 이유 외에 적기는 해도 남편이 주는 돈이 욕심이 났다.
조르고 졸라서 몇십만 원 받았어도 없는 것보다 나으니 그랬던 것 같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여자 혼자 산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 일도 아니고 애들이 장성해서 분가한 자식도 있는데 결손 가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돈도 그렇다.
내가 전업주부도 아니고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일을 계속할 것이니 남편이 주는 돈쯤은 없어도 된다.
아이러니하게 남편의 불성실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남편과 함께 살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나 불안감을 생각하면 그깟 것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
그동안 왜 그렇게 놓지 못하고 붙들고 살았는지...
그 날부터 남편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편도 철저히 자기만을 위해 살았다.
식재료를 직접 사다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먹고 씽크대를 잔뜩 어질러 놓고 나가는가 하면, 거실에 누워 TV 보며 먹던 과일씨나 과자봉투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도 말 섞기 싫어서 묵묵히 치웠다.
수십년을 이렇게 살았는데 3개월을 못 버틸까.
날짜를 카운트하며 하루하루 지워 나갔다.